삶을 담은 라디오에 황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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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담은 라디오에 황혼은 없다
[이권우의 산길 인터뷰 ] 서정협 KBS PD
  • 이권우 도서평론가 (한국PD교육원 패컬티)
  • 승인 2015.03.24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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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는 도서평론가다. 책 읽고 널리 알리는 직업이다. 오랫동안 책 소개하는 방송에 나가는지라 아는 방송인이 많다. 책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등산인바, 요즘에는 산 타며 드는 인생 이야기를 기록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PD저널>은 등산하면서 그가 만난 방송인들과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그는 현재 한국PD교육원 패컬티(전담교수)이기도 하다. 첫번째로 만난 이는 KBS 클래식FM <장일범의 가정음악>과 <재즈수첩>을 연출하고 있는 서정협 KBS PD다.  라디오 출연으로 인연을 맺었지만, 이들은 삶에서 인생을 나누는 친구 같다. <편집자>

▲ 자료사진 ⓒPixabay
산길에서 두 차례나 만났다. 한번은 겨울에 한번은 여름에, 그것도 북한산에서. 북한산은 품이 워낙 넓은지라 아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두 번이나 만났고, 그럴 때마다 한 번 산에 같이 오르자 약속했다. 몇 차례 연락해 일정조절을 해보았으나 안 맞아 함께 산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시간이 딱, 맞았다.

서정협 KBS 라디오 PD. 나와는 인연이 깊은 PD다. 도서평론가라 나부대며 책 소개하느라 KBS 1라디오에 나가다가 가장 대중적인 프로그램인 <황정민의 FM대행진>에 출연해 만난 이가 서 PD다.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당시에는 짝패가 없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나중에 1라디오 <정용실의 문화포커스>에서 다시 만난 이도 그였다. 고전을 놓고 전문가와 한 시간 가까이 토론하는 코너에 내가 패널로 참가했다. 되돌아보면 도서평론가라는 직함을 걸고 라디오를 통해 대중과 만나거나 전문적인 식견을 발휘할 기회를 준 이가 서정협 PD다.

▲ 불광역 ⓒ위키피디아
불광역에서 보기로 했다. 2번 출구로 나가 구기터널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비봉능선에 오르는 길을 만난다. 길이 평탄하고 이야기 나누며 걷기 좋다. 어느 계절이나 오르기 좋다. 겨울에는 양지인지라 상대적으로 눈이 빨리 녹아 좋고, 봄과 가을에는 탁 트인 전망과 풍경을 즐기며 걷기 좋다. 한 겨울에 그이를 만난 데도 이 비봉능선이다. 문수봉까지 가면 제법 길게 능선을 타게 된다. 단점은, 날씨가 좋으면 시장통이 된다는 점. 그렇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만큼 좋다는 뜻이니. 자꾸 오르다보면 사람은 적어지게 마련이다. 묵묵히 가다보면 오롯이 둘만 걷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만나자마자 아이들 이야기부터 했다. 이제는 대학생이 된 딸들 이야기다. 서 PD와 딸 이야기를 하니, 우리가 그만큼 나이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방송 같이 할 적에 둘 다 일산에 산지라 맥줏집에서 애들이랑 같이 월드컵 국가대표 경기를 응원한 적이 있다. 딸내미가 초등 학교 1학년 때다. 그랬던 녀석들이 자라나 대학생이 되었다. 옛날 같으면 정치 이야기하다 음담패설로 끝나는 이야기패턴을 반복했을 텐데, 서로 달라졌다. 딸들 대학생활, 연애 이야기로 시간 보낸다. 마침 서PD가 석사학위를 한 레스터 대학에 딸내미가 교환학생으로 간지라 물어볼 말이 많았다. 요즘 아이들은 비슷한 모양이다. 하라면 안하고, 하고 싶어야 비로소 하는 꼴이 말이다. 그런 면에서 아비 노릇하기가 어렵다. 마냥 기다려야 하고, 무조건 지지해주어야 하니. 가야할 길을 가리킬 수도, 결정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다. 그래도 두 녀석이 자기 갈 길을 정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터다.

내가 보기에 그이는 라디오 PD로서 능력이 출중하다. 황정민과 정용실 아나운서와 방송하면서 두 프로그램을 청취율에서나 인지도에서나 두루 높은 성과를 보였다. 라디오 PD들이 대체로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나 조예도 깊었다. 더욱이 최종 결정권자로서 미덕이 있다. 자기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모양새를 자주 보였다.

FM대행진에 나가기로 하고 서 PD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전에 책을 소개한 출연자는 여러 권을 준비해 방송한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한 사람이 일주일에 어떻게 여러 권을 읽고 소개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모질게 말했을 테다. 그건 책 안 읽고 보도자료 낭송하는 거라고. 서 PD가 중재안을 냈다. 7분정도 한 권 소개하고, 3분 정도 여러 권을 소개하자고. 전문가라십시고 고집부릴 일은 아닌듯해 동의했다. 단 소개만하는 책은 내가 안 읽은 책이라는 점은 알고 있으라고 명토박았다. 몇번 방송을 듣더니, 내 뜻대로 한권만 하자고 했다. 읽고 하는 것과 보도자료 요약해 말하는 게 명확히 구분된다면서 말이다.

▲ KBS 2라디오 부스 ⓒ위키피디아
그는 잊어버리고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 결정이 큰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나중에 보니,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단순히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한권을 제대로 소개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평론가라는 직함 단 사람들이 체면 지키며 방송할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다.

다른 출연자는 물론이거니와 진행자나 작가의 말을 경청하고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해 결론을 내리는 열린 태도는 자주 보았다. 그래서인지 서 PD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좋아했다. 단순한 출연자로만 여기지 않고 그들과 인연을 맺고 배우려는 자세가 돋보였다.

한 번은 대학로에 있는 와인바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유명한 음악평론가가 클래식을 선곡해주는 곳이었다. 그이와 더불어 방송하면서 클래식 공부를 깊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로 1라디오와 2FM을 맡았던 서 PD는 몇 년 전부터 1FM에서 일하는데, 그때 배운 바가 큰 힘이 되고 있을 터다. 그렇다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PD는 아니었다. 전체 프로그램에 어울리지 않은 코너나 불성실한 패널은 시쳇말로 자르는 것도 지켜보았다. 어느날, 한 라디오 작가에게 서 PD 장점을 말하면서 혹시 KBS PD들은 다 그러냐고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상상에 맡기겠다.

서 PD는 KBS 19기로 1993년에 입사했다. 그런데 이 기수가 라디오 PD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KBS에서 라디오 PD만을 뽑은 첫 기수란다. 방송사 사정에 어두운 내가, 왜 라디오 PD만 따로 뽑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답은 단순했다. 라디오로 안 오거나, 왔다가 텔레비전으로 도망가니 전문성이 떨어져 따로 뽑았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그랬던 모양이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때는 라디오 전성시대이지 않았나? 대중과 울고웃으며 인생고락을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던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특별한 기수라는 자부심이 있어서인지 서 PD 동료들은 잘 단합하고 방송에서도 출중한 성과를 보였다.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전자를 안고 태어난 나같은 사람이 보면 부러운 장면이다. 격려하고 치켜세우고 이해하는 모습들을 자주 보았다. 이 기수의 PD들은 방송만 잘 하는 게 아니라 방송의 공영성을 지키는 운동에서도 중추세력이었다. 하긴, 이 점은 KBS 라디오 PD들의 미덕인 듯싶다. 녹음하러 KBS에 갔더니 마침 파업출정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대열에 내가 아는 라디오 PD들이 수두룩했다.

▲ 서정협 KBS 라디오 PD ⓒ이권우
워낙 테니스 좋아하기로 호가 났던 이가 산을 즐겨 타는 이유가 뭔가 싶었다. 요즘 아파트에는 테니스장 없는 데가 많은 모양이다. 일산에서 여의도로 옮기면서 테니스장이 없는데로 왔고, 직장에서도 테니스 좋아하던 사람들끼리 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산도 오래 탔던 모양이다. 구기동에서 탕춘대 능선 타는 법을 일러주었다. 산행 처음하는 이들에게는 그 코스가 제격이란다. 이번 봄에 지리산 종주를 계획하고 있는데, 좋은 산악회도 소개받았다. 출발지가 일산이라니 나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비봉능선을 타고 문수봉 오르자면 암벽을 타야 한다. 한번도 이 코스로 가지 않았단다. 청수동암문으로 가는 우회로만 탔다는데 이번에 같이 오르기로 했다. 밑에서 보면 절벽인지라 위험해보이지만, 안전시설이 잘 갖춰졌고, 오르면서 보는 풍광이 장관인지라 내가 꼬드겼다.

내가 제일 궁금했던 건 라디오의 미래였다, 라디오는 황혼의 시기를 맞이했을까? 그는 조심스러웠다. 워낙 매체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으니 예단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일단 과거보다 라디오를 듣지 있는 이유가 흥미로웠다. 전통적으로 청소년층이 밤에 라디오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소년층이 더는 라디오를 듣지 않는데, 그 하나는 교육환경 탓이다. 과거보다 더 강고해진 입시교육으로 청소년들이 라디오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헛웃음이 나왔다.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 경험에 따른 분석이었다. 라디오도 듣지 못하는 아이들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다른 하나는 이제 음악을 즐기는 통로가 다양화하면서 라디오의 지배력이 현격히 줄었다고 한다. 하긴, 음악 들으러 라디오 켜는 일은 없을 테다. 주변에서 라디오를 듣는 경우를 보면, 자가운전자들이 출퇴근할 때인 듯싶다. 굳이 라디오를 듣지 않더라도, 과거에 라디오에서 누리던 그 무엇을 다른데서 즐기고 있는지라 청취자가 현격히 줄었다는 말이다.

PD 개인으로 이 위기를 돌파할 역량은 없다고 한다. PD 자신이 전문성을 확보하면 유리한 면이 있겠지만, 시사, 교양, 음악, 장애인, 북한 주민 및 재외교포 등속을 두루 아우르는 다양한 채널을 유지해야 하는 KBS 라디오로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클래식 프로그램을 하면서 오히려 방향성에 대한 확신은 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이 하향세이긴 하나, 클래식 채널이 대체로 1% 남짓 청취율을 유지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한단다. 전체 인구수에 대비해 클래식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의 비율이 상당히 낮은데, 이 정도의 청취율이라면, 문제는 역시 차별화한 콘텐츠와 품질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 콘텐츠가 어떤 방식으로 소화되든, 청취자들이 좋아할 내용이 담긴다면, 희망은 있다는 말이다.

성공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라디오 프로그램 형식을 띤 것들이 많다. MBC <라디오 스타>는 고품격 음악방송이라 하면서 정작 음악이 주가 아니라 그렇지 전형적인 라디오 포맷이다. JTBC <뉴스룸>은 MBC <시선집중>의 텔레비전 버전이라 평가해도 무방할 터다. 라디오가 그만큼 실험정신과 전위성을 발휘하기 좋은 매체였다는 뜻이다. 아무리 매체환경이 급격히 바뀌더라도 이 장점을 살리면 라디오의 미래는 있을 터다. 문제는 시스템에 있을지 모른다. PD들이 도전하고 실험할 적에 얼마나 믿고 기다려주느냐는. 물론, PD들이 더 긴장하고 더 공부해야 하는 면도 있겠다.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종국에는 실패한다는 것은 PD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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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봉에 오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다 대남문으로 내려와 이북오도청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이제는 내려가 두부에 막걸리 마실 상상으로 버틸 때다. 그도 이제 방송할 날이 10년 남짓 남았다고 엄살이다. 인생 후반기를 준비할 때다. 직장과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 뭐하고 싶을까? 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산과 자신의 직업이 아우러지는 일을 꿈꾼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생각했단다. 요즘 어르신들이 대체로 마을회관에 모여 소일한다는데, 허락을 받아 그곳에서 나누는 대화를 녹음했다가 편집해 팟캐스트를 하고 싶다고. 굳이 지리산이 아니어도 좋단다. 산 타다 맘에 드는 곳이 생기면 자꾸 거기에 정착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은 늘 같다. 그곳에서 한평생 살아온 이들의 꾸미지 않은, 그러나 삶의 향기가 잔뜩 묻은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라디오의 생명은 삶인지도 모른다. 노래를 틀어도 삶이 들어 있고, 출연자들이 나와 수다를 떨어도 결국 삶의 이야기며, 청취자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라디오 들으며 웃고 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바로 라디오에 삶이 있으니 가능한 법이다. 더욱이 라디오는 일하는 사람의 오래된 벗이었다. 힘들고 지치고 우울한 영혼들에게 청량제 구실을 해왔다. 이 정신만 잃지 않는다면, 라디오는 절대 황혼을 맞이하지 않을 터다. 은퇴후 할일을 고민하기에 서 피디는 아직 청년이다. 물론, 만나면 아이들 이야기를 먼저하는 중늙은이가 되었지만, 정신만은 여전하지 않던가.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식상할 수 없다. 꾸미지 않은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고대하는 만인의 즐거움을 위해,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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