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KBS-1TV 「용의 눈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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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KBS-1TV 「용의 눈믈」
불길한 욕망의 신화 ‘용의 눈물’
  • 승인 1998.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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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한정석 <연합회보 편집부주간>
|contsmark1|현대 프랑스 영화사에 한 획을 긋고 요절한 천재감독 트뤼포는 흥행에 성공한 모든 영화를 ‘사회학적’ 사건으로 규정했다.수용자가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모든 문화적 텍스트에는 그 사회의 의식구조와 무의식,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이 비밀스럽게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텍스트속에 구조화된 코드(code)들을 해독(decode)하는 것은 바로 그 텍스트가 속한 사회의 정신적 지형을 탐색하는 것이된다. 이러한 이론적 틀을 가지고 kbs의 사극 「용의 눈물」을 평가해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있는 작업이다. 그동안 상업적 저널리즘 비평만이 이 텍스트의 서사를 현실정치에 대입하여 흥행성있는 기사를 써왔을 뿐, 이론적 접근을 통해 이 작품의 가치를 규명해 보려는 시도는 전무했기 때문이다.일부 역사주의 비평관점에서 이 드라마가 객관적 사실(史實)과 작가적 상상력의 한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했다는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다.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작품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용의 눈물」이 자신의 텍스트속에 용해시킨 우리 사회의 내밀한 욕망과 억압을 구조적으로 읽어내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용의 눈물」이 취하고 있는 신화적 내러티브에 주목하자.「용의 눈물」이 조선의 건국과 영웅들의 활약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서사성에 있어서 명백한 신화이다. 그런데 바르트가 논증했듯이 신화란 결국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서사로서 신화는 자기 충족성때문에 욕망과 억압을 이항대립적으로 구조화한다.「용의 눈물」 속에 씌여진 중요한 기의(記意)들은 다음과 같은 욕망/억압의 이항대립체로 구조화 될 수있다. 왕권/신권, 권력/소외, 지배/도전, 남성/여성, 부권/모권, 중전/나인 신화의 힘은 그 사회의 지배체제적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확인시키고 재생산하는데 있다. 「용의 눈물」에서 왕권과 신권을 둘러싼 갈등이 현실정치에 대입되면서 ‘똑똑한 정치가가 나라를 구한다’라는 식으로 담론화된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정치’라는 시민주의적 요청을 정권신수설과 같은 권력엘리트주의로 후퇴시키는 시대적 반동이었다. 한때 내각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이 국민의 여론을 무시한 채 이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차용한 것을 상기해보라!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비현실적인 담론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진보적인 정치세력마저 대항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용의 눈물」이라는 텍스트속에 내재된 또다른 신화적 요소가 우리의 의식적 차원이 아닌 보다 깊은 구조, 즉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신화적 요소는 다름아닌 남성/여성, 부권/모권, 중전/나인으로 구조화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였다. 강력한 군주로서 카리스마와 지모를 갖춘 태종 이방원은 현실에서 부권의 위협과 가족의 해체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남성들로부터 이상적인 자아로 동일시됐다. 이러한 동일시는 역사란 영웅들의 산물이며 민중은 그들을 따라야 한다는 다분히 파쇼적 이데올로기를 저항없이 생산해낼 수 있게 한다.「용의 눈물」이 인기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에 박정희의 유령이 때없이 출연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 예찬론자들의 입에서 경제발전에 대한 박정희의 치적만이 칭송될 뿐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한 반성적 고백이 없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 드라마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전형성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강력한 정치적 은유가 대선정국을 끝으로 그 시효를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극중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contsmark2|-방원은 어느날 잔치에서 노 나인이라는 당돌하고 적극적인(?) 궁녀를 알게되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다. 노 나인이 새로운 신분상승에 들떠있을 무렵 이 사실을 안 중전은 그야말로 질투의 화신이 되어 임금을 질타한다. (여기서 그녀는 완전히 히스테리적이다) 방원은 임금이 궁녀 하나를 건드렸기로서니 무어 그리 대단한 거냐는 투로 중전을 나무라고, 중전은 급기야 노 나인을 ‘네년이 나쁜 년’이라며 잔인하게 처벌한다.-이 장면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사극에는 늘 이런 부분이 등장해 왔다.그렇다면 왜 이러한 부분이 정당화되고 남성들에게 재미를 주는것일까? 그것은 사극이 가부장적 질서라는 신화를 통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욕과 소유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자고로 영웅호색이라 하지 않았던가!더욱이 노 나인의 방원을 유혹하는 듯한 태도와 결국 중전에 의해 처벌받는다는 설정은 가부장적 사회가 매춘에 대해 갖는 유별난 강박관념의 자기고백이다. 근엄한 가부장적 질서내에서 매춘은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억압의 대상인 것이다.드라마가 이 가부장적 긴장을 해결하는 방법은 전형적이다. 노 나인과 같이 욕망의 대상인 여성은 윤리적으로 타락하기 쉽고 부권에 도전하는 여성, 즉 중전은 잔인하고 사악한 존재로 규정된다. 중전이 노 나인을 처벌함으로써 가부장의 위기가 해결되는 방식에 주목해 보라! 최근 「용의 눈물」이 왕과 중전, 그리고 외척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꾸려가는 것도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신화소였던 왕권/신권의 대립항을 부권/모권으로 치환하면서 왕권의 절대권력을 부권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사회에 이러한 징후는 매우 불길하다.강력한 왕권이 현대 남성에게는 부권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확장된 남근, 즉 직장은 절대가치를 얻는다. 직장을 잃는다는 것이 무의식속에 잠재하는 유년기의 거세공포를 일깨우면서 어른들은 또다시 오이디푸스 궤적을 따라 무의식의 바다를 항해한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이 자신의 거세공포를 타자인 여성에 재투사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필연적 억압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버지들이 안방에서 의젓한 자세로 「용의 눈물」에 몰입해 있을 때 자녀들, 특히 딸들이 건넌방에서 「토요미스테리극장」과 같은 귀신이야기에 비명을 지르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욕망과 억압은 동시대적 모드로 발현되고 그녀들은 자신에 대한 억압의 회귀를 무의식속의 공포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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