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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봄을 준비할 때다
송성익

|contsmark0|10만년전, 지구는 빙하기였고, 인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 땅에는 사람들이 나타나,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 한반도 역시 그랬다.그러나 이 최초의 사람들에겐 봄이 없었다. 겨울만이 존재했었다. 그 지긋지긋한 추위와 굶주림의 기억만이 그들의 dna정보에 각인된 채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이 처절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다시 흘렀다. 지구는 고통받는 인간들을 위해 봄을 만들었다. 여름도, 가을도 그렇게 만들어졌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누구도 봄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바라던 것이기는 했으나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은 없는 것이었기에 봄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번 잘못된 믿음은 곧장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수록 인간들은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다. 그것은 혹독한 추위와 죽음을 예고하는 의심스런 징조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 빛을 피해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동굴속으로 움츠러 들었다.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이 땅의 만물을 키워낼 때도 인간들만은 좁디좁은 동굴속으로 움츠러 들 뿐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을 때만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정된 생활의 틀 속으로 찾아들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dna 유전인자까지 겨울에 길들여져 있었다.그리고 또다시, 근 10만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렇게 수없이 되풀이된 1998년, 겨울의 끄트머리에서 그들의 후손들은, 그들만의 얘기를 나눈다. imf, 감봉, 감원, 명예퇴직, 실직 그리고 두려움에 관한 얘기들을 귓속말로 나눈다. 그러면서 그들은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한 간절한 말 한마디를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선 눈빛만으로 은밀한 약속을 지어낸다. 차라리 그 어둡고 혹독한 겨울날, 조그맣게 마련되었던 온돌가에 앉아 그들만의 얘기를 오손도손 나누던 그 때, 그 시절로 되돌아 감이 좋지 않겠느냐고! 피워준 모닥불 가에 앉아, 던져주는 먹이로 주린 배를 채우며, 그저 숨만 쉬고 있더라도 살아있음이 자랑스러울 수 있었던 그들만의 겨울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10만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들의 dna 유전자 정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언제던가, 아득히 먼 옛날, 이 땅의 조상들 중 한무리가 봄을 찾아 나섰다. 뼈속이 움츠려들고, 삶과 죽음의 공포가 낮과 밤을 덮칠지라도, 그들은 살금살금 그 어둡고 칙칙한 동굴속을 빠져나왔다. 때론 여전히 매섭기만 한 동굴밖의 추위로 목숨을 잃기도 했고, 때론 기나긴 겨울날의 횡포앞에 절망하며 죽어가기도 했지만,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있었고, 마침내 그 봄은 믿고 준비하는 자의 봄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그제서야 이 땅의 모든 이들은 좁디좁은 동굴 생활을 마감하고, 푸르른 대지 위에 씨뿌려 농사지으며, 밤하늘의 맑은 별빛을 바라보며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 뒤의 봄은, 저절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이제 곧 3월이 오고, 그 이름만으로도 서러운 진달래, 개나리가 만발할 때 쯤이면, 사람들은 모두 다, 이제 정말 봄이 왔구나, 그래도 봄은 오는구나라며 감탄할테고, 그 감탄 뒤 긴 한숨은 늘어만 가겠지만 모른다. 이땅의 방송쟁이들은 모른다. 아니, 아직까지는 그래도 순수와 열정을 잃지 않았노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던 이 땅의 pd들도 모를 것이다. 그 봄볕 속에 아지랑이처럼 길게 이어지는 한숨의 의미를. 그 pd들에게도 3월은 여전히 살아남아야 할 혼란스런 겨울 속의 한 장면일테니까.그래서일까? 98년 봄 개편은 2월의 가운데에서 일찌감치 끝냈다. 번개불에 콩구워 먹듯, 삽시간에, 아주 일사불란하게 조용히 끝났다. 이제 아무도 프로그램을 얘기하지 않는다. pd들도 프로그램에 대해선 말이없다. 다만 앵무새처럼 고효율의 경쟁력있는 프로그램만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되뇌이고 있다. 그러다면 지금까지 할 수 있음에도 저효율의 저질 프로그램들만 양산해 왔단 말인가? 아무도 대답이 없 다. 이젠 시대가 결코 과거와 같은 행태를 용납하지 않는단다. 1인 다기능의 슈퍼맨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용감하게 얘기해도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얘기한다. 어딘 얼마가 짤렸고, 어딘 얼마가 깎였다고. 그리곤 그렇게 짤리지 않았고, 깎이지 않았음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대견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나라, 이 땅의 방송쟁이들, 아니 pd들은 한순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월급쟁이들만 남았다. 이제 곧 3월이 온다. 정말 진달래,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3월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 따뜻한 봄 햇살을 피해 그 어둡고 칙칙한 동굴속으로 제 발로 찾아들진 말자. 그리고 이제 우리의 목소리를 모으자. 그리고 소리내어 외쳐보자. 10만년을 간직해 온 우리의 비굴한 dna 유전자 정보를 우리의 후배들에게, 우리의 자식들에게 또다시 물려주진 말자. 몇 명이 짤렸고, 얼마나 깎였는지 이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대신 이 땅의 방송에 대해 얘기하자. 우리가 우리의 비겁함에 길들여지도록 우리를 세뇌해왔던 모든 법과 제도에 대해서도, pd가 pd됨에 대해서도, 우리의 진정한 주인인 말없는 민중들의 침묵에 대해서도 이젠 가슴을 열고 얘기하자. 모든 것을 원점에서 새롭게 얘기해보자. 두려움에 움츠려있는 자에게 이 겨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이젠 정말, 우리들의 봄을 믿고, 준비해야 할 때인 것이다.|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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