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과 버라이어티 속 '인간의 조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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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중계] 일곱 번째 PD인문학 포럼 ‘엔터테인먼트와 인간의 조건’

“TV는 벽에 붙은 파리에요. 우리가 벽에 달라붙어 있는 파리를 보는 게 아니라 파리가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미디어로부터)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는 셈이죠.”

23일 저녁 7시 서울 서교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열린 일곱 번째 인문학 포럼 ‘엔터테인먼트와 인간의 조건’에서는 한국방송가의 대세 장르로 자리잡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의 현주소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진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강연의 발제는 허철 영화감독이, 전 SBS 예능 PD 출신인 이동규 동덕여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리얼리티 장르의 본질을 여러 맥락에서 살펴보고 ‘리얼’과 ‘인간의 조건’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를 연계해 현재의 리얼을 기반으로 하는 프로그램과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 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과연 지금의 리얼리티 예능이 우리들의 삶을 더 좋게 해주고 있을까?’는 질문으로 시작된 이날 포럼은 2시간 동안 엔터테인멘트의 본질을 성찰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미디어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허 감독은 강연 시작 전 엔터테인먼트(entertain)의 어원을 소개했다. 엔터테인먼트는 사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inter와 유지한다는 의미 tenere라는 두 단어의 합이다. 결국 사람들 사이를 즐거움을 통해 유지해준다는 의미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 과거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는 사람들의 사적 영역에 침투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좀 더 끈끈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수행해냈고 지금도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서울 서교동 오픈스튜디오에서 열린 'PD인문학포럼'에서 토론 중인 허철 감독(좌)과 이동규 교수(우).ⓒPD저널

하지만 감독은 현재의 미디어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사적영역에 침투해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게 아니라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선을 붕괴하고 사적영역 그 자체를 자본화한다고 봤다. 즉, 개인의 사적영역 자체가 상품이 된 시대라는 설명이다.

허 감독은 “지금의 리얼리티 예능의 독점적 인기현상은 우리가 TV를 보는 게 아니라 TV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리얼리티 방송은 관찰의 상업화를 통해 영리를 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사생활 자체가 방송의 소재이자 소비되는 상품으로 변질됐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제시했다.

허 감독에 따르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자유주의 질서에 따라 기업적 사고방식을 일반 개인에게 점점 세뇌하고 있다. 요리를 잘할 것,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꿀 것, 육아를 충실히 할 것 등 자기계발을 독려하고 책임 있는 개인만을 강조하다보니 미디어를 접한 대중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사적관심과 사생활에 골몰하게 된다.

허 감독은 미디어가 앞장 서서 자연스레 복지제도 마련 등 국가가 국민에게 해야 할 의무를 면제시켜 줄 수 있다는 점까지 우려한다. 감독은 이같은 문제를 “미디어가 기업과 소비자 시민 사이의 중개자 역할로 전락”했다고 표현했다.

또한 그는 제작자부터가 현재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자기 성찰적 개인화’를 끊임없이 강요하며 사적 영역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적영역과의 연계를 맺는 리얼리티로 나아가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허 감독은 강연을 끝맺으며 “인문학적 접근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며 우리의 삶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라며 “과연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지, 미디어는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대한 고찰을 늘 해야 한다”고 인문학적 고민과 접근을 강조했다. 덧붙여 허 감독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성찰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와 교양물들이 점점 줄어들고 사라지는 현실에 대해 고민해 보자고 제언했다.

다음은 허철 감독의 강의 내용 주요 정리다.

소통’으로 ‘사이’를 연결해야

소통은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말한 기본적 전제 틀 역시 소통에 기반한 사회성이다. 나는 아렌트가 제시한 ‘사이(among, between)'를 강조하고 싶다. 사이에서는 항상 소통이 전제되는데 소통의 전제조건은 다양성과 다름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진정한 소통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를 분류했는데 하나로 제시한 ‘액션’은 ‘노동’이나 ‘일’과는 달리 공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참여를 의미한다. 공적 공간은 정치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여기에는 항상 ‘액션’과 ‘스피치’가 존재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타인과의 상호연계를 가질 때 이용하는 인간의 행위이자 도구다.

전시 스펙타클로 전락한 미디어

하지만 럿거스대학의 마이클 워너 교수는 액션의 현대적 매개체인 미디어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상호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포장하는 역할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 미디어가 전시 스펙터클로 전락했다는 분석이다. 워너 교수의 비판대로 진정한 스피치와 액션이 없는 사회 속의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는 사람일 뿐이다. 바꿔 말하면 스피치와 액션이 살아있는 인간이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인 셈이다.

그럼 우리는 과연 ‘리얼’ ‘실시간’을 강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좋은 삶’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보통 학계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프로그램 전반에 있어 실제 연출 상황을 최소화하여 제작하는 리얼리티를 근간으로 제작된 것’을 말한다. 하지만 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사적영역 자체가 상품화된 프로그램’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사적인 삶, 곧 우리 자체가 상품화된 장르가 리얼리티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상품화가 문제

2000년대 중반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예능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잡은 시점부터 우리의 세속적 일상생활이 방송의 소재가 되고 이벤트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꾸며내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한국적 리얼리티는 외국 리얼리티와는 달리 치열한 경쟁보다는 가족적 분위기, 출연자의 가슴 뭉클한 사연, 노력과 꿈, 성공의 가치를 강조하거나 결과보다는 과정, 출연자의 도전과 인간적인 면이 부각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버라이어티보다는 ‘리얼리티’에 좀 더 가중치가 쏠리면 요즘은 유명인의 삶을 엿보고 일반인화하는 식의 프로그램이 대세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상업화가 가속화되는 것이 문제다. 타 산업과의 연계도 용이해졌다. 프로그램 자체가 광고로 변질됐다는 의미의  'Advertainment'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음악, 패션, 관광사업 등의 비즈니스로 변질되어가는 모습 역시 문제다. 결론적으로 지금 미디어는 개인 주체와 주체성의 상품화가 이뤄지고 개인이 브랜드화되는 지점까지 왔다.

그 결과 개인 사생활까지 상품화되면서 육아, 외모가꾸는 법, 건강 비법, 집을 어떻게 고치는 가에 대한 문제까지도 프로그램 소재로 사용된다. 결국 사적공간에서의 이야기만 남고 공적영역은 온데간데없다. 미디어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붕괴를 가져온 셈이다.

이처럼 미디어나 방송 프로그램이 사람들 간의 사이를, 지역을, 다른 시간대를 연결해주는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방송이 말하는 공익을 위한 소통인지, 그저 세속적이고 사적영역의 이야기만 소비되는 건 아닌지 제작자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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