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낀 단추, 김영삼 정부의 방송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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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낀 단추, 김영삼 정부의 방송 정책
[기고] 조항제 부산대 교수
  • 조항제 부산대 교수
  • 승인 2015.11.2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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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서거했다. 오랜 군부정권의 종식을 의미하는 문민정부(1993년 2월~1998년 2월)의 출범은 방송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SBS 개막(1990년 11월)으로 지상파 방송 3사의 경쟁 구도는 문민정부에 접어들면서 가속화됐고, 케이블TV와 지역민방의 개막(1995년)은 다채널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하지만 부실한 팽창 정책은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방송사 내부의 미진했던 개혁 조치들은 ‘내적 자유’에 대한 방송인들의 열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PD저널>은 한국 방송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조항제 부산대 교수(신문방송학과)의 글을 통해 ‘김영삼 정부와 방송’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 서울광장에 마련된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 분향소 ⓒ문화체육관광부

3당 합당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 여론이 우세했던 듯했다. ‘통합’이라는 인위적 수단이 매우 개인적이고 권력(집착)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대통령의 인기가 유명 탤런트 다음의 2순위로 오를 정도로 이런 여론을 쉽게 잠재웠다. 하나회의 척결, 안가 같은 권위주의 유산의 철폐, 금융실명제의 실시 등으로 이어진 이른바 문민정부의 개혁은 민주화의 바람 속에서도 정권 교체에 실패했던 당시의 국민들의 마음 속을 후련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영삼 정부의 개혁 열기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고, 종래에는 IMF위기까지 불러 다소는 비극적으로 끝을 맺었다.

당시의 방송을 주제로 한 이 글 또한 이런 전체적인 분위기가 방송에도 재연되었다는 결론부터 말하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김영삼 정부는 방송에서 먼저 KBS, MBC의 사장을 이전과 다른 인물로 임명하면서 ‘문민성’을 보여주었다. TBC 출신의 홍두표와 MBC의 강성구는 정권에 가까웠던 신문인이나 관료가 주로 맡았던 사장 군상(群像)이 아니었다. 이들은 방송에서 잔뼈가 굵은 ‘방송인’으로 비교적 한국방송의 생리를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홍두표는 KBS 1TV의 광고를 중단하고 TV다큐멘터리의 대명사가 된 ‘3대 스페셜’을 정착시키면서 적어도 외형적으로 KBS가 공영방송의 틀을 갖추는데 크게 기여했다. 뉴스도 최소한 이전의 편파는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성구 역시 1992년 50일 파업의 여파로 힘들어했던 MBC 조직을 추스르는데 ‘선배’로서 나름의 역량을 발휘했다.

▲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홍두표 전 KBS 사장

그러나 이들의 임명은 내정과 요식행위라는 이전의 관행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아 전혀 개혁적이지 않았다. MBC의 강 사장이 마산MBC에 있을 시절 대통령의 친아버지와 가까웠다는 후문까지 그랬다. 이들이 취한 개혁적 조치와 방송가의 변화들도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홍 사장은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병산시키는 편법으로 시청료거부운동의 여파를 잠재웠고, 조직 합리화는 일부 학적 변동자들을 명예 퇴직시키는 미봉책으로 덮었다. 이들이 할 줄 아는 게 시청률 경쟁뿐이어서 결국 ‘TV 끄기 운동’ 같은 극단적 반발을 불러왔다는 지적은 결코 숨길 수 없는 이 시대 방송가의 단면이었다. 이들의 사장으로서의 말로 또한 그러했다. 강 사장은 추문으로 물러났고, 홍 사장은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갔다가 뇌물사건에 연루되었다. 강 사장은 국회의원이, 홍 사장은 무죄가 되면서 명예 회복을 부분적으로 했다지만 이들의 처음과 끝은 급전직하라는 표현이 조금도 손색이 없다.

민영상업방송이었던 SBS에는 가시적 조치가 없었다. 그러나 SBS가 말초적 경쟁을 주도해 물의를 일으켰다는 점에 문민정부의 개혁 드라이브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SBS의 돌파구는 1995년에 주 4회라는 파격적 편성으로 방송된 <모래시계>였다. <모래시계>는 SBS가 신생의 치기를 벗어나 나름대로 우리 사회의 주요 미디어로 발돋움한 계기였다. 또 사회성 드라마 <땅>을 중도 하차시켰던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가 확실히 차별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1995년에는 케이블TV와 지역민방을 도입, 신설했다. 이전부터 정권이 바뀌면 마치 선물처럼 새로운 미디어를 준다는 속설이 있었지만, 사실 케이블TV는 이미 노태우 정부의 방송제도연구회에서 일정이 제시된 것이다. 지역민방 역시 SBS가 출범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모래시계>를 비롯한 일부 SBS의 프로그램이 사회적 관심을 모을 때마다 ‘왜 우리는 못 보냐’는 지방의 불만이 쇄도했고, 지역민방의 신설은 일찌감치 초읽기에 들어갔다. 정책당국은 지역민방이 이전과 달리 침체에 빠진 지역방송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오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출범하자마자 IMF의 위기에 처한 지역민방은 SBS의 네트워크로서의 지위에 더 많이 충실했다.

▲ 1994년 12월 16일 이경재 당시 공보처 차관이 한강케이블 TV 개국 시험방송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e-영상역사관

최초로 다채널시대를 연 케이블TV(종합유선방송)는 처음에는 상당히 공익적인 바탕에서 설계되었다. 프로그램공급업자(PP)는 다양한 전문편성을 위주로 장르 간 경계가 엄격했으며 겸영은 금지되었다. 전국을 세분시켜 편재한 케이블방송국(SO)은 영업활동을 하면서 해당 지역에 어울리는 자체 채널을 운영하도록 했다. 독점의 제한 차원에서 MSO는 허용되지 않았다. 초반의 많은 매몰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망 사업자(NO)는 한국통신이나 한국전력 같은 공적 기업에 맡겨졌다. 영역 간 겸영도 금지되었고 외자의 도입은 최소화되었다. 이런 국가적・공익적 설계 때문에 기존의 중계유선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정보통신부와 공보부의 관할 다툼이 빚어졌고, 종합/중계 사이의 소모전적 경쟁은 케이블TV의 조기 정착에 큰 애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규제의 틀은 금방 무너졌다. 때마침 닥친 IMF가 최초의 유료방송 정착을 막았기 때문이다. 각종 제한들이 규모・범위의 경제, 합리화, 경쟁력 등의 생존의 논리에 따라 쉽게 풀렸다. NO가 일찌감치 사업에서 손을 뗐고, PP・SO의 겸영이 허용되자 M자 돌림의 복수소유업자들(MSO, MPP, MSP)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으며, 채널(군)을 분류해 요금을 따로 매기는 티어링이 실시되면서 시청률이 낮은 채널들이 퇴출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케이블TV는 당초에 약속했던 창조적이면서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거의 만들지 못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채널이 기존의 지상파나 미국 드라마의 재방송에 의존해 한때 케이블TV는 무분별한 난개발정책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 SBS '모래시계' ⓒSBS

김영삼 정부의 방송은 이렇게 처음과 끝이 달랐다. 문민의 첫 단추는 확실히 이전의 군부정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비전이나 철학은 없어 개혁이 조금만 벽에 부딪혀도 금방 옛날로 되돌아갔다. 시대적 한계는 틀림없이 있었다. 그러나 3당 합당이 이 한계를 더욱 협소하게 만든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노동통제용으로 만들어놓은 상업방송에서 <모래시계>가 만들어진 것이 김 정부의 공이라면, IMF 위기가 가속시킨 시장논리는 김 정부가 초래한 필연적 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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