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히스토리로 본 영상인문학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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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영상미래학 ②]

[글 싣는 순서]

1. 영상인문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2. 자연과학이 밝혀준 사실(fact)에서 출발
3. <인류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류를 보다
4. 빅히스토리로 본 영상인문학의 가능성

5. 지구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 - <인터스텔라>, <마션>, <엘리지움>
6. SF, 인류의 뿌리를 탐구하다
7. 영상, 인문학을 대중화하다.

'인류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류를 보다

▲ 내셔널지오그래칙의 다큐멘터리 ‘인류가 사라진 세상’

어느 날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인류가 사라진 세상>(Aftermath ; Population Zero, 2008)은 인류가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핵전쟁, 운석충돌, 기후변화, 신종바이러스 등 여러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다큐의 관심 밖이다. 다만, 인류가 사라졌을 때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줄 뿐이다. 모든 생물 중 인간은 지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겼다. 인류 70억 개체 중 절반 이상이 도시에 모여 산다. 지구 표면에서 도시는 1%, 농촌과 목초지는 3분의 1, 여기에 5억대의 차가 달리고 있다. 인간은 대기권 바깥부터 땅속까지 손길을 뻗혔고,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흔적을 남겼다. 인간이 없는 세상을 그려보면, 인간이 한 행동을 돌이켜볼 수 있다. <인류가 사라진 세상>는 절박한 인간의 실존을 캐묻는 어엿한 ‘영상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2008년에 개봉한 SF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스콧 데릭슨 감독)도 마냥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외계인(키아누 리브스)은 인간의 모습으로 지구에 와서, 푸른 별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류를 멸종시키려 한다. 결국 인간에게 공감과 사랑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희망도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인류가 계속 생존하도록 내버려 둔다. 이 영화는 너무 생경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던졌다는 흠이 있지만, 인류의 생존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만든 영상인문학이었다.

인공지능도 큰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낮은 차원의 인공지능’은 이미 실용화됐다. 감각이 있고 스스로 학습하는 ‘높은 차원의 인공지능’도 상상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 70억 명은 모두 다르게 생겼는데, 이렇게 각자 개성을 지닌 인공지능을 인간이 발명할 수 있을까? 생명의 무한한 다양성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인간보다 특정 기능이 뛰어난 로봇이 언젠가 나타나게 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이들은 인간이 지구에 도움이 되는 존재인지 아닌지 판단해서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면 인간을 절멸시킬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입에 오르내린다.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토털리콜> 같은 영화도 영상인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빅히스토리로 본 영상인문학의 가능성

“세계 경제는 2015년에 정점을 찍고 성장을 멈춘다.” 
2012년 한국에 번역 출판된 <성장의 한계>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책은 ‘로마클럽 보고서’ 30주년을 기해 나온 수정증보판이다. 1972년 MIT의 젊은 과학자 4명이 <성장의 한계 - 인류의 위기에 관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브레이크 없는 경제 성장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분석한 종합 보고서였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뒤, 저자들은 성장지상주의가 낳을 결과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했다. 결론은 간단하다. 세계의 산업은 2015년~2020년 사이에 정점에 도달한 뒤 2100년에는 1900년 수준으로 퇴보하며, 자본의 고삐를 풀어놓는 ‘규제완화’는 파국을 앞당길 게 예상된다는 것이다. 가치관의 일대 전환을 이루지 않으면 인류는 빙하에 부딪치는 타이타닉호처럼 침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촌이 과거 어느 때보다 좁아졌다는 건 매일 체험한다. 한 세대 전에 외국인을 보면 무척 신기해했지만, 이제 서울 거리는 물론, 변두리의 공장과 농어촌의 일터에서 외국인을 만나게 된다. 이제 국경을 나누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인다. 월드컵이 벌어지면 축구공처럼 생긴 지구별 이쪽저쪽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지구 반대편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으로 서로 응원하고 위로한다. 1980년대 김남주 시인은 “달러에는 국경이 없다”고 노래했지만, 이젠 사람에게도 국경이 없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지구 제국이 곧 도래할 거라고 예측했다.

▲ 책 '성장의 한계' ⓒ갈라파고스

지구가 만원(滿員)이라는 건 누구나 실감할 수 있다. 인류가 처음 지구 전역에 살게 된 시기의 전체 인구는 1천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상상해 보자. 12,000년 전 지구 위에 살았던 인간이 모두 서울이란 한 도시에 모여 있다는 얘기 아닌가. 20세기의 100년 동안 인구는 4배 늘어서 60억이 됐고, 21세기 들어서 10억이 더 증가하여 이제 70억을 넘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세계의 도시 면적을 다 합하면 지구 표면의 1%에 불과한데, 여기에 35억 넘는 사람이 모여서 부대끼며 살고 있는 셈이다.

개인의 에너지 소비량도 급증했다. 수렵 채취시대 사람들은 하루 평균 2000~3000 kcal의 에너지를 사용한 걸로 추정된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량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오늘날 한 개인은 하루 평균 약 20만 kcal를 사용한다. 먼 옛날 조상들의 100배 가까운 에너지를 소비하는 셈이다. 정신적 스트레스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미국의 역설>을 쓴 마이어스 교수는 미국 사회의 비관적 변화를 이렇게 정리했다. “이혼률 2배, 10대 자살률 3배, 폭력 범죄 4배, 감옥의 죄수 5배, 미혼모 출산 6배, 동거 부부 7배, 우울증 10배.” 한국은 심하면 심했지, 이보다 나을 것 같지 않다. 극심한 경쟁으로 스트레스가 쌓이니, 누구든 툭 건드리면 폭발하여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소비의 증가 없이 생산을 지속할 수 없다. 20세기 자본주의의 핵심은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9세기엔 금욕이 미덕이라고 가르쳤지만 20세기엔 소비를 근본으로 여기는 가치 전환이 일어났다. TV에서 끊임없이 소비를 설교하는 광고주가 새로운 사제 계급으로 올라섰다. 더 많이 소비하려는 욕구는 여전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돈이 없으니 소비를 억제할 수밖에 없다. 급속한 성장을 이룬 한국은 더욱 심각하다. 욕구불만은 커지는데 이를 충족시킬 방법은 없으니 파국이 불가피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폭증하는 생산과 소비는 자원 고갈과 생태 파괴를 회복하기 어려울 지경까지 몰고 갔다. 지난 50년 동안 서울이 겪은 기후 변화는 지난 5천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큰 것 같다. 요즘은 기후 변화를 날마다 체감할 수 있다. 사과 재배지역은 해마다 북상하고, 남쪽에선 열대 과일이 자란다. 바닷물 온도가 1도 가량 올라가서 어류 생태계가 달라졌다.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고 봄과 가을이 짧아졌다. 한국에 열대성 스콜이 내리고 토네이도가 발생한 건 처음 보는 현상이다. 사람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라면 이 기후 변화가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 아닐까?   

▲ ⓒpixabay

인간의 기술문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빨리 발전했고, 현대로 접어들며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속도가 붙었다.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우리 조상은 오랜 세월 사냥과 채취로 살아갔다. 인구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먹고 사는 방식도 조상이 전해 준 그대로였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고, 수많은 동물 중 하나였다. 약 13만 년 전부터 우리 조상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아메리카로 생존영역을 확장했다. 인류가 지구 전역에 살게 된 건 약 12,000년 전이다. 호주의 대형 유대류, 시베리아의 맘모스, 북미의 마스토돈 등 대형 포유류들은 인간의 발길이 가는 곳마다 멸종했다. 지구 위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 12,000년 전, 인류는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농업을 발전시켰다.

농업의 탄생은 인류사에서 가장 큰 변화였다. 논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운 결과 식량 생산이 10배 이상 증가했고, 인구도 급격히 불어났다. 인간은 처음 풍요를 맛보았지만 삶은 더 고단해졌다. 더 많은 재화를 가진 사람이 생겨나 계급이 분화했다. 물물교환을 위해 시장이 열렸고, 시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됐고, 도시와 농촌을 아우르는 국가가 탄생했다. 종교는 지배자의 권위를 뒷받침했고, 더 많은 영토와 노동력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일상사가 됐다.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은 농업혁명에 버금가는 인류사의 커다란 변화였다. 칼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콜럼버스의 발견이 산업혁명의 물적 토대가 됐다”고 지적했다. 아메리카의 황금과 아프리카의 노예 노동을 바탕으로 유럽 경제가 폭발적 성장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콜럼버스 일행은 1492년 대서양을 건넜다. 이들을 맞이한 원주민들은 1만 4천년 전 시베리아를 거쳐 육로로 도착한 조상들의 후손이었다. 이들의 만남으로 인류은 비로소 하나로 연결됐다.

원주민들은 콜럼버스 일행이 하늘에서 온 신이라고 생각했다. 콜럼버스 일행은 원주민들이 황금을 찾게 해 줄 안내자, 맘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라고 생각했다. 인디오가 인간인지 아닌지 따져 본 ‘바야돌리드 논쟁’은 지금 보면 희극에 가깝지만, 결론은 희극과 거리가 멀었다. “인디오는 인간이 맞지만 아프리카 흑인은 인간이 아니다.” 무자비한 약탈과 노예 노동의 비극이 이어졌고, 이 비극을 연료로 산업혁명의 기관차는 시동을 걸었다. 근대 유럽의 번영은 아프리카의 희생 위에서 이뤄졌다.

인구가 폭발했고 식량 생산도 그만큼 늘었다. 그러나 에너지 소비 증가와 생태 파괴는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재앙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 동안 일어난 변화는 인류가 20만년 동안 겪은 모든 변화를 합한 것보다 컸다. 더 심각한 것은 산업혁명의 결과 가난한 나라와 부자나라가 갈라지는 ‘대분기’(Great Divergence)가 일어났고, 이 불균등 발전은 점점 더 심화돼 왔다.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는 점점 더 빨리 달려, 현기증 나는 속도로 오늘의 세계까지 이어졌다.

20세기 동안 세계 경제 총생산량은 2조 달러에서 39조 달러로 거의 20배 증가했는데, 조금 더 자세히 보면 1900년에 2조 달러, 1950년에 5조 달러, 2000년에 39조 달러다. 해가 갈수록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가 붙었다는 얘기다. 1995년에서 2000년까지 5년 동안의 경제 성장폭은 고대 인류 문명이 발생하여 20세기가 될 때까지 1만년 동안 일어난 변화보다 더 컸다.
  
20만년 인류사에서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치며 인구, 에너지, 식량 생산량이  어떻게 증가해 왔는지 표시한 곡선이다. 20만년 가까운 수렵시대에 이 곡선은 완만히 상승하고, 거의 직선처럼 보인다. 12,000년 전 농업혁명 이후 이 곡선은 비교적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완만한 곡선이다. 300년 전의 산업혁명 이후는? 무척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하여 20세기 들어서는 거의 수직상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개인이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20년이다. 긴 시간의 단위로 보면 세상의 인구와 에너지 소비와 식량 생산은 그래프처럼 파국을 향해 수직상승하고 있지만, 우리의 유한한 눈에는 그저 완만하게 성장하는 세상이 보일 뿐이다. 오늘도 정부와 언론은 성장률을 어떻게 하면 높일 수 있을까 분석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냥 두면 어디로 갈 것인가?

<성장의 한계>를 쓴 도넬라 메도즈는 성장지상주의를 재고하지 않으면 인구 과잉, 환경 오염, 자원 고갈, 식량 부족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지구 차원에서 인구를 지금 수준으로 억제하고, 자원 소비를 70% 수준으로 줄이고, 빈부격차를 전면적으로 해소하면 인류는 남부 유럽 국가들의 생활 수준으로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자, 여기까지 서술한 내용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같지 않은가? 이 책의 결론이 수학적으로 맞지는 않겠지만, 저자들의 절박한 호소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내용도 영상인문학의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영국  BBC나 디스커버리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 세계 유수의 다큐멘터리 채널 뿐 아니라, 우리나라 TV에서도 이 주제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이미 많이 방송한 바 있다. 특히 EBS 다큐프라임 <인간탐구 욕망 - 황금>(2012)은 유럽과 중남미의 만남이 황금에 대한 욕망 때문에 피로 얼룩졌다고 통렬하게 고발한 수작이었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는 책보다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인문학적 성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영상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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