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세상보기 첫번째- 문화읽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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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이 죽었다"면 대중음악의 새로운 영토는 무엇인가?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contsmark0|대중음악, 팝 음악, ‘가요’대중음악의 원론적 ‘정의’는, 첫째, 전문적인 소양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이자(즉, ‘예술’ 음악 art music이 아니며), 둘째 전국의 익명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음악(즉, ‘포크’ 음악이 아니다)이다.그런데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현황을 살펴 보면 이런 원론적 정의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10대 취향의’ 음악, ‘음악성 없는’ 음악, ‘댄스(땐쓰)’ 음악이 tv와 라디오 등 공중파를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고, 그에 따라 열광하는 다수를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이들이 ‘대중’음악으로부터 소외당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그런데 이는 비단 작금의 현실만은 아니고 한국만의 현실도 아니다. 적어도 195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각지의 대중음악은 미국의 팝 음악(pop music)에 영향받아 큰 변화를 맞이했다. ‘popular music’이 ‘pop music’으로 변형되는 과정은 단순한 용어상의 축약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전까지는 가족 전체 구성원의 오락 family entertainment의 수단이었던 대중음악이 청년(혹은 청소년) 계층의 소비를 위한 수단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때부터 팝 음악은 청소년의 전유물이 되었다.한국의 경우도 ‘뽕짝’이라고 불리던 ‘전통’ 가요가 현대적 대중가요로 바뀌는 계기는 1950년대 이래의 문화적 미국화(cultural americanization)다. 일본 엔카를 원형으로 하는 뽕짝(=트로트)의 32마디 형식, 일본식 5음계와 화성 진행, 특유의 리듬 패턴(뽕-짜자-뽕-짝), 나아가 애상과 비탄이 가득찬 음색 등은 서양의 팝 음악의 형식과 구조에 흡수·통합되었다. 주의할 점은 이 ‘전통’ 가요의 요소가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변형된 채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대중음악 관계자들이 ‘뽕’이라고 부르는 한국 대중음악의 ‘수퍼장르’(supergenre)는 이런 미국화 과정의 산물이다. 단, 적어도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가요는 여전히 가족 오락의 기능을 수행했다.
|contsmark1|대중음악에 대한 대안과 ‘록 이데올로기’이렇게 형성된 대중음악 일반, 특히나 ‘한국 대중가요(약해서 가요)’가 진지한 음악 팬들에게는 경멸과 무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다. 특이한 현상은 이런 경멸과 무관심이 클래식이나 재즈같은 순수 음악(fine music)의 옹호자들뿐만 아니라 ‘팝 음악’을 즐기는 이들로부터도 나온다는 점이다. 이는 1970년대 이후 록 음악 (rock music)을 즐기는 층(이른바 ‘록 매니아’)들에게서 가장 강한 현상이다.이를 ‘외국(특히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 간단히 치부할 수는 없다. 1960년대 서구의 반문화 운동(counterculture movement)을 주도했던 록 음악은 이후 ‘롤링 스톤’(rolling stone) 등을 통해 ‘전문적 록 평론’을 탄생시키면서 현대의 예술로 정착해 갔다. 따라서 록 음악은 여타의 팝 음악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상징이었지만 ‘다른’ 미국, 즉 ‘청년 반항의 미국’을 상징했다. 한 예로 카네기 홀에서 노래부르는 ‘팝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의 ‘계산된 연예’와 우드스톡 야외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록 아티스트’ 지미 헨드릭스(jimmy hendrix)의 ‘자연스러운 퍼포먼스’는 다르게 보였다. 이로써 1950년대에는 ‘청소년 비행’의 상징이었던 록 음악은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청년 반문화 운동’의 효소가 된 것이다.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록 평론가’들은 이때의 간접 체험을 통해 형성된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품고 있는 듯하다. 대중음악인이라도 예술적 자율성을 확보하여 음반산업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진지한’ 음악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오랜 바람이었다. 그리고 이는 1970년대 중반 김민기, 한대수 등의 ‘포크송’과 신중현과 엽전들의 ‘록 음악’ 등의 음악적 실험이 제대로 개화하지도 못하고 독재 정권의 물리력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었던 혹독한 경험에 대한 ‘회한’의 형태를 띠고 있다.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1980년대 이후 팝 음악의 본고장에서는 이런 ‘록 이데올로기’가 점차 진부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록 이데올로기란 간략히 말해서 ‘팝과 록의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록 음악은 팝 음악의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팝 음악이 ‘아닌’ 음악, 팝 음악의 ‘타자’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팝 음악이란 ‘주류의’, ‘상업적’, ‘인공적’, ‘순응적’ 음악인 반면, 록 음악은 ‘대안적’, ‘창조적’, ‘진정한’, ‘저항적’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헛점들이 있다. 몇몇 논자들이 지적하는대로 록 이데올로기에는 ‘백인 중산층 남성’의 편견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즉, 록 음악을 ‘보통의’ 팝 음악과 분리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는 지적이다. 팝 음악의 주요 청중들이 ‘흑인’이나 ‘소녀’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타당하다(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도 록 매니아들은 ‘보통의 팝이나 가요’를 좋아하는 평범한 팬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최악의 경우 록 이데올로기는 ‘상업적이지 않다’는 점을 내세워 더많은 음반을 판매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는 비아냥(이자 현실)도 있다.
|contsmark2|록은 죽었다?실제로 1960년대의 반문화 운동 세대의 사상적 지주였던 록 이데올로기는 점차 현실에 적응되어 갔다. 앞서 언급한 ‘롤링 스톤’의 최근호를 보면 고급차, 요트, 골프채 등의 고가 상품들이 광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히피(hippies)는 여피(yuppies)가 되었다. 록 음악은 ‘청년 반항이 장사가 잘 된다’는 것을 실증하는 사례가 되었다.대중음악계에서 이런 현상에 대한 ‘반항’은 1970년대 말부터 이미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후반 이래 펑크(punk), 디스코(disco), 뉴 웨이브(new wave) 등은 ‘록 음악의 진정성’이 허구라는 사실을 폭로한 경우였다. 물론 그 방식은 달랐다. 섹스 피스톨스 등 런던의 펑크 밴드들은 록 음악 역시 여타의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인공적으로 신비화(mystification)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록 음악을 직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모든 것을 일거에 탈신비화(demystification)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디스코는 팝 음악이란 ‘어차피 인공물’(artifice)임을 공표하면서 록 음악을 간접적으로 야유하고 조롱했다.그 결과 1980년대 이후에는 ‘청년’들이 록 음악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aor(adult oriented rock)이라는 용어가 있듯이 록 음악은 성인 취향의 음악이 되어 갔는데, ‘록은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의미다. ‘반항’의 기호를 계속 발견하려는 사람들은 록 음악이 아니라 흑인 게토에서 발생한 랩·힙합이나 댄스 클럽에서 발생한 하우스나 테크노 등에 더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물론 1980년대 이래 ‘록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흐름들도 언더그라운드에서 지속되어 왔고, 이런 흐름들 중 일부가 1990년대 초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이는 나름의 가치를 갖지만, 그게 정말 ‘대안적’이라고 믿는 사람이 ‘정말’ 많을까?한국에서 ‘대안적 소리’의 (불)가능성이상은 어쨌든 외국의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한국에서 ‘록의 시대’는 개화해 본 적이 없고, 청년 반항을 세일즈하여 수백억을 챙긴 ‘록 스타’도 없다. 록 이데올로기에 아무리 헛점이 많더라도, 록 음악은 뮤지션의 예술적 개성을 발휘하고 음반산업의 질서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해 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어떤 ‘힘’에 의해 규제받았던 한국의 대중가요계에서 ‘제대로 된’ 록 음악의 프로젝트는 아직 유효한 것이라는 생각은 적어도 ‘동정표’를 얻을 만하다. 결국 산울림, 들국화, 시나위, 넥스트로 이어지는(정확하게 말하면 완전히 끊겼다가 다시 이어가는) 한국에서 록 음악의 궤적들이 재조명되는 작금의 현실은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실제로 1970년대의 실험이 종언된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주류 대중가요는 ‘정형’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노래 형식이나 멜로디, 리듬, 화성 등의 기본적 요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감상적인 사랑과 이별의 내러티브를 가진 가사는 몇십년째 변화가 없다(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만나다 /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다 / 돌아서서 눈물짓는다’). 또한 악기음들이나 사운드의 전체적 짜임새(texture)는 연주자의 개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특유의 ‘가요 믹싱’을 통해 키치적으로 중성화된다.이는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의 다양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주류 가요계에서는 요지부동의 관행으로 자리잡아온 특징들이다. 언더그라운드에 머무르다가 지상으로 대두한 가수들도 이런 관행에 도전하지는 않았다(혹은 할 수 없었다). 1970년대에 ‘밤무대 그룹사운드’ 출신이 트로트로 전향했듯(예를 들어 최헌, 윤수일), 1980년대에는 ‘스쿨 밴드’ 출신이 발라드로 전향했다(예를 들어 변진섭, 이승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나아가 이런 특징들은 1990년대 이후의 ‘신세대 댄스 가요’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신세대 댄스 가요는 힙합, 레게, 하우스, 테크노, 정글 등 최신의 ‘리듬’을 수입하여 가요의 전형적 특징과 융합시켰을 뿐이다. 더구나 ‘스타 산업’의 본격적 제도화로 인하여 언더그라운드(라기보다는 ‘무명 시절’)의 수련 과정조차 생략하고 ‘스타’가 되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첨단 테크놀로지는 아직 ‘예술적 사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물건찍듯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만 전용되고 있다. 그 결과 반(反)주류 음악은 고사하고 비(非)주류 음악마저도 발생하기 곤란하고,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청중을 확보하기 힘들다.따라서 1990년대 중반 현재 록 음악이 주류의 일각을 차지하는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더라도 그 의미는 예전같지 않아 보인다. ‘자의반 타의반’ 주류에 진입한 이들은 이미 형성된 ‘대중적’ 취향을 따라 ‘록 발라드’를 만들어 부르지 않을 수 없다(아직까지도 ‘복장이나 두발 규제’가 있는 현실은 언급하기 싫다). 오히려 ‘댄스 음악’을 추구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 같은 경우가 음악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 모두에서 ‘록 음악’보다 더많은 파급력을 미쳤다. 이런 사례들은 록 음악이 한 번도 청년 문화를 주도한 적이 없던 한국에서도 ‘록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결국 현 시점에서는 어떤 장르든 주류 세계에 진입하여 ‘의미있는 음악’을 추구하겠다는 ‘미디어 개입주의자’의 실천은 한계가 명백해 보인다. 그보다는 차라리 ‘매스’ 미디어로부터 독립하여 소규모 커뮤니티들과 그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현실적으로 보인다. 최근에 몇몇 라이브 클럽과 독립 레이블(인디 레이블)이 형성되고 있는 현상은 이런 작업을 위한 작은 출발점일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그들만의 공동체’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보다 많은 청중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는 추후에 평가할 문제다. 다행인 것은 최근의 젊은 세대들이 이제 더 이상 ‘록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록 음악은 물론 랩·힙합, 테크노 등이 동시에 참고되고 있다. 이들 사이의 상승작용을 한 번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 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질적 구성원들을 ‘우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필자의) 거부감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정서란 불변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다른’ 소리와 ‘다른’ 감성의 원천이 외국(주로 영미권)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비극이자 희극이고,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contsmar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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