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보도개입 녹취록’ 보도, 이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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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보도개입 녹취록’ 보도, 이렇게 어렵다
‘무보도’ KBS 기자들 “피가 거꾸로 솟는다” 탄식…SBS 기자들은 ‘긴급발제권’ 동원해 보도
  • 김세옥 기자
  • 승인 2016.07.06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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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얼굴에 튄 더러운 침을 닦아내는 시늉조차 않고 있다.” (KBS 보도본부 27기 기자 18인) / “이 당연한 기사가 왜 이리 어렵게 방송돼야 하는가.” (언론노조 SBS본부 노보 중에서)

2014년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던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세월호 관련 정부 비판 보도와 관련해 외압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KBS의 메인뉴스에선 관련 보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KBS 보도국 내부가 꿈틀대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KBS 보도본부 27기 기자 18인은 ‘청와대 보도 개입, 언제까지 침묵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명 성명을 냈다. 이들은 “(녹취록 속) 이정현 전 수석의 겁박을 실제로 접했을 때, 그리고 그 화살이 우리의 존재 이유인 KBS 뉴스를 향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 딱 그 느낌이었다”고 탄식했다.

▲ 언론노조 등 언론단체의 ‘이정현 녹취록’ 공개 당일인 6월 30일 KBS의 메인뉴스인 <뉴스9>에선 관련 소식을 전하지 않았고, 이런 모습은 현재(7월 5일 기준)까지 이어지고 있다. ⓒKBS 화면캡처

이들은 “일개 임명직 공무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마음대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욕설까지 섞어가며 목에 핏대를 세울 수 있는, 그러면서 대통령도 봤다며 간교한 협박을 서슴지 않는, KBS의 위상이 딱 그 정도인가보다”라며 “그런데 정작 KBS는 아무 말이 없다”고 지적했다.

언론노조 등 7개 언론단체가 이른바 ‘이정현 녹취록’을 공개한 건 지난 6월 30일이었다. 하지만 KBS는 당일은 물론 보도본부 기자들의 이 성명을 나올 때까지 닷새 동안 메인뉴스인 <뉴스9>에서 단 한 번도 이와 관련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언론단체들과 야당의 ‘방송장악 진상규명 청문회’ 요구가 쏟아지고 청와대와 여당의 “홍보수석 본연의 업무”라는 해명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KBS 뉴스에서만큼 존재하지 않는 이슈였다. 언론노조 KBS본부에 따르면 KBS는 소속 기자가 언론노조 등의 녹취록 공개 기자회견을 취재하고 기사작성까지 했음에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성명에서 기자들은 “법적 대응은 고사하고, 그나마 작성한 단신 기사도 무시됐다”고 거듭 지적하며 “우리 얼굴에 튄 그 더러운 침을 닦아내는 시늉조차도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홍보수석으로 할 일을 한 것’이라는 (청와대‧여당의) 치졸한 변명에 동조하고 있는 건가. 혹, 지금도 (KBS 수뇌부들은) ‘통상적인’ 전화를 받고 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기자들은 “그게 아니라면 회사는 (청와대의 방송법 위반에 대한) 법적 대응으로, 보도국은 뉴스로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며 “불과 2년 전 길환영(당시 사장)을 몰아낼 때 당신들의 결기가 거짓이 아니었다면, 당장 침묵을 멈추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보도국 기자들의 기명 성명 발표 당일이었던 지난 5일 KBS <뉴스9>에선 여전히 ‘이정현 녹취록’ 관련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이날 국회 대정부질문에선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군부처럼 고문하고 위협해야 편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건 아니다”(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 “누가 보더라도 이정현 전 수석이 (KBS의) 보도 제작과 편성 과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는데 이를 ‘통상적 협조’라고 하면 지금도 그렇게 일하지 않겠냐”(이용주 국민의당 의원)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에 대해 황교안 국무총리는 “홍보수석으로 협조를 요청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답변하며 논란을 반복했다.

SBS ‘긴급발제권’ 동원해 ‘이정현 녹취록’ 보도

이른바 ‘이정현 녹취록’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비단 KBS에서만 보인 게 아니다. 녹취록 공개 당일 MBC의 메인뉴스인 <뉴스데스크>는 보도 말미 녹취록 공개 사실과 함께 이에 대한 이정현 의원의 해명을 짧게 전했을 뿐이고, SBS의 메인뉴스인 <8뉴스>도 관련 내용을 30초로 짧게 전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SBS <8뉴스>는 녹취록 공개 다음 날이었던 지난 1일 일곱 번째 순서에 1분 46초 분량의 리포트 ‘세월호 보도 개입 논란…野 청문회 추진’을 배치했다. 이 리포트에선 녹취록 속 이정현 전 수석의 KBS 보도 개입 발언들을 육성으로 전하고, 이를 둘러싼 야당의 “보도통제” 지적과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과 당사자인 이정현 전 수석의 “홍보수석 본연의 임무”, “협조요청이었을 뿐” 등의 발언까지 보도했다. 여야 공방 형식으로 관련 소식을 전한 것이다.

▲ ‘이정현 녹취록’ 공개 다음날인 7월 1일 SBS <8뉴스>의 관련 보도. 이 보도는 SBS 기자들이 ‘긴급발제권’ 을 발동해 관철했다고 알려졌다. ⓒSBS 화면캡처

언론노조 등의 녹취록 공개 다음날에야 이런 보도가 가능했던 배경엔 SBS 기자들의 ‘긴급 발제권’ 발동이 있었다. 이 사실은 지난 5일 언론노조 SBS본부 노보를 통해 알려졌다. 긴급발제권은 중요 아이템이 뉴스에서 배제되거나 부적절한 아이템이 방송될 때, 현장 기자들의 집단 발제로 보도 실무 대표자가 편집회의에 참여해 의견을 밝힐 수 있도록 한 제도다. SBS는 지난 3월 노사협의회를 통해 이 제도를 만들었고, 이에 따른 보도준칙 개정 이후 처음으로 긴급발제권을 발동했다고 알려졌다.

노보는 “(언론단체의) 녹취록 폭로 당일 현장 취재기자들과 기자협회는 리포트로 이 내용을 중요하게 다룰 것을 요구햇지만 보도책임자가 단신 배치를 끝까지 고집했다”고 전하며 “이에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보도국 소속 조합원들이 개정 보도준칙에 따라 지난 1일 사상 처음으로 긴급발제권을 가동해 후속 보도를 관철했다”고 밝혔다.

노보는 “(긴급발제권을 통해 보도한) 당일 해당 기사는 정치권 차원의 공방으로 번지며 파장이 확대된 이정현 녹취록 관련 사안을 여야 목소리를 대비해 배치하고 야권의 청문회 추진 소식 등을 다뤘다”며 “SBS 독자적으로 정치권력의 언론장악 행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기자들) 스스로 공정방송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 결과물인 만큼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진 않다”고 자평했다.

이런 가운데 노보는 “이 당연한 기사가 대체 왜 이리 어렵게 방송돼야 하는가. 혹시 방송개입이 본연의 업무라고 주장하는 청와대의 입김이 우리에게도 미치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SBS 보도국장 출신이 현직 홍보수석이라서 알아서 눈치를 보는 것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한편 SBS <8뉴스>는 기자들의 긴급발제권을 통한 ‘이정현 녹취록’ 후속 보도 이후 더 이상의 관련 보도를 배치하지 않다가 지난 5일 국회 대정부질문 여야 공방을 전한 ‘여당은 박원순 때리기…야당은 이정현 때리기’ 리포트에서 이정현 전 수석의 KBS 보도국장과의 통화는 명백한 보도 개입이라는 야당의 비판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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