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삶을 견딘 재일한국인 할머니들, 평화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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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삶을 견딘 재일한국인 할머니들, 평화를 말하다
[제작기] KBS ‘KBS 스페셜-빼앗긴 날들의 기억, 가와사키 도라지회’
  • 안해룡 독립PD
  • 승인 2016.08.18 1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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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고,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는가를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이 전쟁하는 나라가 되어가는 것을 알고 이것은 절대로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픈 다리, 굽은 허리를 잊고 일어섰습니다. 젊은이를 전쟁에 보내서는 안 됩니다. 전쟁고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손에게 평화로운 날들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지난해 9월 5일 가와사키시 사쿠라모토초의 거리에서 재일한국인 할머니들은 이렇게 외쳤다.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발신한 재일한국인 할머니들은 ‘재일 고령자 교류회 도라지회’의 멤버들이다. 이날 데모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문제에 대해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 전쟁의 체험자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았기 때문이다.

전후 재일한국인이 자신들에 대한 민족 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강력한 운동을 전개했지만 자신들의 문제를 넘어서서 일본 정치를 향한 메시지를 보낸 경험은 적었다. 제국 일본의 식민지 경험을 온몸으로 감내한 재일한국인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일본 사회를 강타했다.

▲ KBS ⓒKBS

재일한국인 할머니들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직접 쓴 호소문과 늦게 배운 서툰 일본어 글씨로 쓴 현수막. 걷기도 힘든 노령의 재일한국인 할머니들은 이 현수막을 들고 “평화가 제일, 평화를 지키자!” “전쟁 반대, 절대 반대!” “아이들을 지키자, 젊은이를 지키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사쿠라모토초의 데모는 300미터를 걷고 끝났지만 울림은 컸다.

전쟁 반대 데모에 참가한 김방자 할머니(85세)는 “우리기 데모를 할 때 인원이 적을까봐 걱정을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엄청 와서 응원해주었어”라며 그날의 흥분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재일한국인 차별의 역사, 맨 앞에서 모든 걸 견딘 여성들

사쿠라모토초는 공업도시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있는 코리안타운이다. 사회복지법인 세이큐샤의 배중도 이사장이 설명하는 코리안타운 형성의 과정은 이렇다. “1930년대부터 한국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습니다. 지금은 JFE, 과거에는 일본강관이라는 큰 공장이 바로 옆에 있어요. 그 공장 건설노동자의 합숙소가 사쿠라모토초에 들어섰습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전쟁 후 전국 각지에 있던 동포들이 가와사키에 있는 동포들에 의지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졌지요.”

간척지 바닷가 근처에 모여살기 시작한 조선부락은 홍수 때면 물이 집안까지 찾아들었다. 50년이 넘도록 이케가미초에 살고 있는 조정순 할머니(92세)는 “비가 오면 똥덩어리가 부엌에 막 밀려들어오고 형편이 없었어. 도쿄에 이런 곳도 있는가를 알고 놀랐어”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독한 가난의 경험이 온몸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 KBS ⓒKBS

조정순 할머니는 고베로 시집와서 남편을 따라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탄광에서 일했다. 우베시에 있던 조세이 탄광은 해저 탄광이었다. “물밑이라 배가 가는 소리가, ‘탕탕탕’하는 소리가 들려. 천정에서 흙이 두둑두둑 떨어지기도 해. 겁이 났어. 물이 터지면 죽는구나 싶어서.” 목숨을 담보로 한 탄광 작업을 조 할머니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 할머니는 남자들도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는 해저 탄광에서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는 폭파작업까지 했다.

김방자 할머니도 야마구치현의 탄광을 경험했다. “12~13살 때라 지하에서 석탄 캐는 일은 못했어요. 처음에는 배터리를 충전하고 교환하는 일을 시작했어. 3교대를 하니까 하루 종일 쉬는 시간도 없었어. 다음에는 돈을 더 준다고 해서 선탄하는 작업을 했지. 석탄과 못 쓰는 돌을 골라내는 일이야.”

도라지회의 할머니들은 어려서 일본에 건너왔지만 60살이 넘을 때까지 일본 글씨를 읽거나 쓰지 못했다. 일본어를 읽거나 쓰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몸으로 하는 일밖에 없었다. 김방자 할머니는 이렇게 토로했다.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설날도 쉬지 않고 일 년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글씨를 읽지 못하니까 육체노동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여러 가지 막노동을 했습니다.”

고려박물관 관장이 히구치 유이치는 이런 설명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인은 지금까지 해왔던 직업에서 완전히 배제 됐어요. 일정한 직업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막걸리나 엿을 만드는 음식 장사,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지요.”

일본 사회에서 배제 당한 조선인, 재일한국인들은 생존을 위해 ‘날몸’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다. 날몸으로 살아야 했던 70여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지켜낸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가족을 지키고, 가정을 지켜야 했다.

▲ KBS ⓒKBS

“굉장히 힘든 차별의 역사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삶 속에서 가장 앞에 선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어요. 가족을 돌보고 먹을 것이 없는 일본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혜롭게 삶을 극복해왔습니다. 할머니들은 작은 영웅입니다. 생활의 작은 영웅이에요.”

사쿠라모토초의 재일한국인 할머니들과 20년을 동고동락한 사회복지법인 세이큐샤 사무국장 미우라 도모히토의 맺음이었다.

이것이 ‘생활의 작은 영웅’인 재일한국인 여성들의 삶이 역사로 기록되어야 하는 이유다. KBS스페셜 <빼앗긴 나날들의 기억-가와사키 도라지회의 기록>(연출 안해룡·박정남, 작가 김근라/▷다시보기 링크)은 한 번도 제대로 조망 받지 못했던 질기고 강인했던 우리들 할머니에 관한 영상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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