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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7 10:29
  • 수정 2017.07.27 13:43

지금 이 시대, 클래식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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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표재민 기자]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라도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은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MBC PD 출신의 음악칼럼니스트 이채훈(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이 누구나 쉽게 클래식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모차르트와 베토벤」(416쪽, 도서출판 호미 펴냄)을 내놨다. 지난 해 출간된 「몬테베르디에서 하이든까지」를 잇는 「클래식 400년의 산책」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그는 30년 가까이 MBC PD로 일하며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에서 제주 4·3, 여순 사건, 보도연맹 등을 추적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위원은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 <비엔나의 선율-마음에서 마음으로>와 같은 음악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행복했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2012년 파업 직후 MBC에서 해고된 뒤 본격적으로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했고, 지금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엄혹한 방송 현실을 말할 때는 단호한 어조였지만, 음악 얘기를 꺼낼 때는 금세 해맑은 소년의 표정을 짓곤 했다.

클래식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해직 PD로 <뉴스타파>에 있는 최승호 PD가 <PD수첩>에서 쫓겨났을 때 ‘마음이 휑하다’며 클래식 해설서를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마땅한 책이 안 떠올라서 내가 써주겠다고 했어요. 친구가 옆에서 설명해줄 때 음악이 마음에 잘 스며드는 법이죠. 2012년 파업 때 <미디어오늘>에 연재하면서 적절한 기회가 오면 책으로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MBC를 떠난 뒤에는 생계를 위해서라도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웃음)

 

클래식이 어렵다는 인식이 많다.

 

클래식 음악이 어렵다고 느끼거나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고급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죠. 심지어 클래식을 모르면 무식한 것이 아닌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음악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음악을 위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미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면 되고, 클래식으로 조금 확장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정도면 되겠지요.

 

클래식은 르네상스 이후 인문정신에서 탄생했어요. 처음에는 귀족과 성직자 등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점차 시민들이 즐길 수 있게 확산됐고, 유럽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전세계가 누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거죠. 음악 이론을 들이대면 너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음악가들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지금 우리 현실과 접점을 찾아서 소개하는 방식을 취했어요.

이 자리에서 우리 현실과 맞닿아있는 클래식을 소개한다면?

 

모차르트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 그 시대에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알면, 지금 우리에게도 더 생생하게 다가오죠. 만인의 존엄과 평등을 노래한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 3년 전에 초연됐는데, 귀족의 위선을 풍자하며 신분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죠. 결코 한가한 사람들의 여흥이 아니었죠. 모차르트는 창작의 자유를 위해 안락한 삶을 박차고 나온 최초의 자유 음악가고, 베토벤은 자유 음악가로 성공해 신분을 넘어 존경받은 사람이죠.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살던 시대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이었어요. 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시대정신을 음악에 담아서 근대의 이상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출발점에서 모든 시민을 대변하는 음악을 쓴 셈이죠. 지금 이 시대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말기 자본주의, 인공지능 시대로 넘어가고 있어요. 근대의 초기에 이들이 만든 음악은 근대의 말기인 지금까지 빛을 던지고 있다고 봐요.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라도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은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직 PD일 때 보도연맹, 제주 4·3 사건 등 역사를 많이 다뤘는데, 그때도 음악을 많이 들었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역사의 진실에 다가서는 것은 물론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사실 무척 고통스러웠어요. PD가 역사의 상처에 감염돼 아팠던 거죠. 최승호 PD는 탐사 저널리즘을 하면서도 힘들지 않다는데, 참 대단한 친구죠. 저는 한편 할 때마다 고통스러워서 다시는 이런 것 안 한다고 공언하고 일이 닥치면 또 하고 그랬어요.

 

이때 음악이 가끔은 위로가 됐습니다. 클래식 좋아하는 놈이 어떻게 살벌한 현대사 다큐를 했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계셨고, 저 자신도 잘 설명하지 못했는데...우리 역사가 살벌했던 것이지 제가 살벌한 인간은 아니잖아요. 클래식은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합니다. 이런 점에서 억울한 역사의 희생자들을 위무하는 프로그램과 클래식 음악은 통하는 바가 있다고, 요즘은 이렇게 합리화 합니다.(웃음)

 

음악과 방송 무엇이 주업인가?

 

김태호 PD, 김민식 PD, 최승호 PD 같은 동료를 보면 타고난 ‘방송장이’다,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영상이나 저널리즘에 재능과 열정이 가득하죠. 이런 동료 PD들을 생각하면 MBC란 회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그에 비하면 저는 타고난 ‘방송장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인간이 인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고, 그런 맥락에서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방송도 넓은 의미의 교육이라고 판단하여 방송사에 입사했지요.

 

교양 다큐멘터리 PD로서 충실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노력해왔지만, 더 훌륭한 동료 후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영혼 깊숙이 사랑하는 것은 음악인 것 같아요. MBC 떠난 이후 ‘뭘 하든 굶어죽지는 않는다, 이제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했지요. 세상은 저를 방송 전문가로 인정해주지만, 음악계에서는 아웃사이더일 뿐이죠.(웃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누구인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어요. 베토벤도 위대하지만, 모차르트는 ‘음악의 예수’라고 생각해요. 이건 차이코프스키의 표현인데, 제가 볼 때 서양 문명사가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나뉘듯, 음악사는 모차르트 이전과 모차르트 이후로 나뉩니다. 작곡가 이건용 선생도 <현대음악강의>를 모차르트에서 시작하셨더군요. 예수가 사랑의 메시지를 남기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모차르트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메시지로 가득한 음악을 남겨준 채 때이른 자유음악가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음악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곡이 있다면?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들을 수 있는 <마술피리>가 제일 좋겠죠. 윤민석 씨의 노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기억하실텐데, <마술피리>가 똑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프랑스 혁명 2년 후 발표된 이 작품은 공안 통치라는 어두운 시기에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진실이 승리한다고 노래한 거죠. 어두운 시대를 음악의 힘으로 헤쳐나간다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유언 같은 오페라예요.

 

KBS와 MBC 구성원들이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해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1987년 처음 노조를 만들 때 ‘공정방송이 우리의 근로조건’이라고 설명해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 후배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면 슬퍼집니다. 말도 안 되는 자들이 사유화하고 있는 공영방송을 되찾아와야 하며, 이를 위해 KBS, MBC 구성원들은 물론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들이 촛불을 밝혀야 합니다. 공영방송은 우리 모두의 방송인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의 관영방송으로 전락했습니다.

박근혜가 파면된 뒤에도 KBS 고대영, MBC 김장겸은 방송을 사유화해 극우 ‘사영방송’으로 무단점유하고 있는데, 이 적폐들을 하루빨리 끌어내려야 합니다. 막말처럼 들리겠지만, 고대영, 김장겸은 ‘합법의 탈을 쓴 도둑놈’이나 다름없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임면권’을 단호하게 행사해서 이 비정상을 신속히 끝장내야 새 정부의 개혁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KBS와 MBC 노조가 불가피하게 파업을 해야 한다면, 2012년 파업 때 KBS 새 노조가 시도한 ‘리셋 KBS뉴스’가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공영방송이 정상화되면 이런 방송을 하겠다’는 청사진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KBS와 MBC가 과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을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여론을 반발짝 앞서서 끌고 가는 공영방송의 기능은 회복할 수 있겠지만, 이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직접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공영방송은 훨씬 더 겸허해야 합니다. 지금은 시청자가 직접 뉴스를 생산해 인터넷에 배포하고 팩트체킹을 하는 시대입니다. 방송의 모든 결정과정이 투명해야 하고, 시민 여론을 반영하는 프로그램을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기는 어렵겠지만, 시청자와 함께 호흡하는 자세를 견지하면 사랑받는 공영방송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 마디를 한다면?

 

이번 여름, 우리 방송계의 모든 적폐가 다 드러났습니다. KBS와 MBC를 정상화시키려는 양사 PD들, 지상파와의 지나친 갑을관계를 시정하려는 독립PD들, 정리해고에 맞서 회사를 살리려는 OBS PD들, 이한빛 PD의 죽음을 계기로 제작환경 개선을 모색하는 드라마 PD들 모두 힘겨운 상황에서 노력하고 있죠. 최선을 다해 더 좋은 방송 생태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때로 음악에 마음을 맡기는 넉넉함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힘내시길.

 

덧붙이며...

중학교 1학년 때 누나가 듣던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접하고 음악에 푹 빠진 이채훈. 5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 그의 음악 사랑은 변함없는 정의로운 방송을 위한 열정과 어우러져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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