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은 전원이 아니고 전장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욱한PD의 촌방촌설(村放寸說)]

[PD저널=김욱한 포항MBC PD] 추운 겨울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일은 늘 서글펐다. 6시가 되기 전에 도서관 문 앞에 줄을 서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흘러가듯이 대학 도서관 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조한 일상들이 이어졌다. 빵 틀 같은 열람실의 자리에 앉으면 졸리는 눈을 반만 뜬 채 앉아서 좀비처럼 책을 파고들어야했다. 그 때 나는 무엇을 공부했던가. 모든 것을 외우고 또 외우는 암기력 테스트에 내몰렸던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확인 가능한 그 수많은 퀴즈의 정답들을 외우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기업은 또 왜 그런 암기력의 귀재들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그 시절 내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던 지식 혹은 정답들은 내 PD인생의 어디쯤에서 쓰이긴 했던 것일까.

백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대학 졸업생의 언론고시 생활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이른바 대학을 졸업하고도 대학을 떠나지 못하는 잉여 인간으로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요즘 청년들의 절망에 비하면 우리들(586 세대)은 분명 더 나은 면들이 많았다. 입사를 받아 줄 기업들은 여전히 차고 넘쳤고 그 중에서 한 회사를 목표로 정해서 될 때까지 무작정 공부하는 고시형 인간들이 넘쳐났고, 또 그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도 당연한 통과 의례 쯤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그 시절 대학을 다녔던 대부분의 청년학도들이 그러하겠지만 나의 대학 시절 역시 배운 것도 공부한 것도 별로 없이 손아귀에서 슬며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지나갔다. 공부하는 것이 자랑일 수 없었고 강의실에 꼬박 꼬박 들어가는 것이 학우들에 대한 미안함을 동반한 부끄러움으로 다가오던 시대였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게다. 그런 대학생활의 졸업이 다가오면서 취직에 대한 실존적 고민은 새벽처럼 다가왔다. 더구나 건성으로 도서관을 드나들던 4학년이 끝나고 졸업장을 받은 후부터는 현실을 넘어선 초현실적인 가위눌림처럼 무섭게 닥쳐왔다. 누군가는 노판(노동운동)으로 떠나고 누구는 신문사 입사를 준비하고 누구는 대기업 합격 소식을 겸연쩍게 알려오는 이른바 스산한 청산의 시절이었다. 그 봄에도 어김없이 일청담에는 벚꽃이 야속하리만치 흐드러지게 피고 졌다.

나의 꿈은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줄곧 PD였다. PD가 뭔지도 모르면서 TV 화면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 존재가 궁금하고 또 좋았다. 신이 내게 남들 모르게 준비해둔 은총 같은 직업이 PD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야할 방송사는 너무도 당연히 MBC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KBS와 MBC 두개의 방송사가 전부였다. 게다가 그 당시의 KBS는 지금의 MBC 같았고, 그 때의 MBC는 지금의 JTBC같았다고 이야기하면 내 젊은 날의 결심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을까..

▲ 포항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문무왕의 만찬' 제2부 ⓒ포항MBC 화면캡처

MBC로 정한 내 젊은 꿈은 바다로 향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이후부터 생긴 로망이었다. 바다가 있는 한적하고 조금은 심심한 지역MBC! 이게 나의 꿈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분지인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나는 늘 바다가 고팠다. 바다를 향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잉태한 결핍의 결과였을 것이다. 바다를 낀 지역MBC 중에 내가 가고 싶어 했던 방송사의 1순위는 강릉MBC였고 2순위가 춘천, 3순위는 제주였다. 그런데 왜 내륙에 위치한 춘천MBC가 순위 속에 들어갔는지 궁금한 분이 있을게다. 고백컨대 대학을 졸업한 뒤 방송사에 입사하고 한참 세월이 지나서 춘천이란 땅을 직접 발로 밟아보기 전까지 나는 춘천이 강릉 위에 인접한 바닷가 휴양도시인줄 알았다. 그런데 바다가 없는 휴전선 근처 내륙에 있는 춘천이라니! 나의 지리학 수준을 탓할 밖에 어쩌랴. 하지만 아직도 나의 머릿속 지리 공간에는 춘천이 강원도의 동해안 어디쯤에 자리 잡은 기차를 타고갈 수 있는 도시로 남아있다. 지금도 술기운이 오르면 김현철의 1집 앨범에 수록되었던 노래 ‘춘천 가는 기차’는 나의 애창곡으로 불쑥 불쑥 노래방 한구석으로 소환되곤 한다.

술 얘기가 나온 김에 제주MBC를 향한 나의 동경도 고백해야겠다. 최루탄과 시위로 어지러웠던 대학생활을 지나오면서 가장 큰 불만은 TV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최수종과 이미연처럼 캠퍼스의 벤치에서 다리를 베고 누워본 경험이 없다는 것인데, 그 때 어렴풋이 방송이 얼마나 구라로 가득 찰 수 있는지를 눈치 챘던 것 같다. 그나마 푸른 청춘의 애틋한 연애 감성을 충족시켜줬던 건 시였다. 그 시가 바로 서정윤의 ‘홀로서기’였다. 선배들의 가혹한 비판과 평단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홀로서기’는 광풍처럼 여린 청춘들을 파고들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시위와 연애 사이를 헤매던 대학 초년 시절이 지나고 돌아와 앉은 누이 같은 덤덤하고 텁텁한 복학생이 되었을 때 또 한 번 나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 시가 있었으니 바로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이 한 구절에 나는 완전히 압도되고 매료되었다. 인생의 쓴 맛을 아는 체하며 소주의 맛을 탐하던 나의 치기가 다시 한 번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의 술잔 속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푸른 밤이 매일 밤 떠다니곤 했다.

하지만 내게 준비된 운명은 포항으로 이어졌다. 서울 쪽 방송사의 입사 시험은 돌아보지도 않고 백수 언론고시생 노릇을 하며 지내는 동안 지역MBC의 신입 모집 공고는 좀처럼 뜨지 않았다. 조바심을 넘어선 초초함이 극에 달할 즈음에 포항MBC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도서관 벽에 조그마하게 나붙었다. 내 순위에는 없던 도시였고 대구에서 멀리 떠나고픈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도 너무 가까운 거리의 포항MBC였다. 하지만 바다가 부르고 있었다.

나이 마흔 살 즈음이면 소나타 혹은 코란도(당대에는 성공의 척도 쯤 으로 여겨지던 차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차를 몰고 한가한 오후에 해안 길을 드라이브하고, 휴일이면 낚시나 배워서 이 바다 저 바다를 돌아다니면 되겠다는 어설픈 환상이 넘쳐났다. 그리고 이왕이면 남들이 외면하는 라디오 피디가 되어서 좀 더 빈티지하고 전원적인 지역의 지식인이 되고 싶었다. 이른바 한가한 전원생활과 은둔하는 지식인의 삶을 꿈꾸며 나의 지역MBC 생활은 시작되었다.

▲ 전국 17개 지부 지역MBC 구성원들이 지난 2월 28일 '낙하산 지역사 사장' 선임구조를 규탄하며 신임 사장 선임을 거부하고 있다. ⓒ언론노조 MBC본부

사설이 길어졌다. 알고 나도 정말 쓸데없는 개인사를 줄이고 이 글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원인 줄 알았던 지역방송사는 전쟁터였다. 그것도 지옥 같은 전쟁터였다. 외부와의 투쟁은 말할 것도 없고 내부와의 싸움도 하릴없이 이어졌다.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전에 시대를 앞서서 그런 생활을 꿈꿔왔던 나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꺼지고 가차 없이 곤두박질쳤다. 한가한 전원의 여유로움을 즐기기에 지역방송사는 너무 황폐했고 은둔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기에는 각박하고 또 살벌했다. 라디오부터 시작된 PD의 업무는 교양과 시사, 음악 심지어 운행과 작가 영역까지 아우르는 종합 잡역부의 역할로 광대하게 펼쳐졌다. 라디오PD 안에서 전문적인 영역과 능력을 개발한다는 말은 서울에서나 통하는 사치였다. 라디오PD가 할 수 있는 올 댓 업무가 우리 지역PD들에게 주어진 업무였다. 그 해 1994년 여름은 사상 최고의 기록적인 더위로 들끓었고 매미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높고 컸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다. 2년차에 TV PD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는 더 넓은 광야에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전지적 PD의 역할을 요구받았고 또 수행해야했다. 드라마를 제외한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에 능통해야 유능한 지역 PD로 대접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위대한 상식인 혹은 잡다한 기능인이 되어야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시스템과의 싸움은 차라리 행복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린 건 시스템 부재와의 싸움이었으니 말이다. 풋내기 신입이 감히 건드릴 수도 불평할 수도 없는 시스템 부재의 카오스를 견뎌내야 했다. 앞선 선배들이 체념하거나 분노하며 걸어갔던 그 길을 나도 쇠고랑 채워진 포로처럼 비틀거리며 따라가야 했다. 가끔씩 터져 나오는 주먹질과 원색적인 욕설은 그저 감내해야할 그 무엇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아! 소나타를 타고 한가한 전원의 삶을 누리면서 변방에 은둔하는 지식인으로 살고자 했던 내 꿈은 어쩌란 말인가. 노동 운동을 하러 떠나던 선배가 술잔을 기울이며 너는 꼭 PD가 되어서 새로운 문화 운동을 해보라 했거늘, 나는 그 가을 고추잠자리처럼 하염없이 맴돌 뿐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작가도 있고 cg와 음악을 담당하는 이들이 함께 일을 나누어 하지만 신입 시절에는 PD 1인이 프로그램의 알파와 오메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만들어야했다. 서울 프로그램 말미의 크레디트 스크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제작진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고 부러웠다.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방송 경력 24년차이지만 아직도 서울의 그 많은 제작진들이 어떤 일을 하고 왜 필요한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지역방송은 PD, 촬영, 작가, 미술, 오디오 정도를 나열하고 나면 크레디트의 허전함을 채울 더 이상의 스태프들이 없기 때문이다. 달랑 몇 줄이면 끝나는 썰렁하고 빈약한 크레디트 스크롤 자막이 나는 늘 부끄러웠다.

변방은 늘 전쟁터였다. 중앙이 권력 투쟁에 빠져있을 때 외세와 맞서서 살과 피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곳이 변방이다. 어찌 보면 중앙은 변방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변방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순간 중앙은 맨살을 드러내고 또 하나의 새로운 변방으로 전락할 뿐이다. 즉 중앙에 종속적인 개념으로 변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변방이 있고 난 후에야 중앙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하위 개념이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등한 본사와 지역사의 개념은 애초에 없었고 지역은 중앙의 식민지에 다름 아니었다. 호젓한 전원을 기대했던 나에게 지역MBC는 굴레를 짊어진 식민지이자 맨땅에 헤딩하면서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맞서 싸워야하는 변방의 전쟁터였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장들은 중앙의 뜻을 받들어 식민지를 다독이거나 지배하는 총독의 역할을 대동소이하게 수행하는 존재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24년의 세월동안 방송사 앞마당의 느티나무 밑동은 조금씩 굵어져갔고 무성한 잎들은 계절마다 부는 바람을 다 받아주고 있었다.

가장 힘들고 아픈 싸움은 시청자와의 싸움이었다. 아니 싸움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고통스런 형벌이었다. 우리가 하늘같이 받들어야하는 지역 시청자들이 우리 지역방송을 욕한다고 항의하거나 무례하게 맞설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근원은 지역민들이 지역 시청자이기에 앞서 중앙 방송의 시청자로 먼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들에게 지역 방송은 소중하고 재밌는 중앙 방송을 갉아먹고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니, 이런 기막히고 억울하고 통탄할 상황은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서러움일 것이다. 지역을 위해 존재하는 방송이 지역민들에게 저주를 들어야하고 존재의 이유를 부정당하는 상황을 나는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다. 국민 유행어가 되었던 “지방방송 꺼!” 라는 소리를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더 큰 외침을 지역 시청자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 전국 18개 지부 MBC 구성원들이 14일 춘천에 모여 '강변파업제'를 진행하고 있다. ⓒ언론노조 MBC본부

실타래처럼 엉킨 모순 덩어리인 지역방송의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방송을 잘 만드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헌데 그 간단하고도 명료한 외길이 실은 한없이 길고도 어려운 길이다. 하고 싶은 일 하나를 하기위해선 하기 싫은 일 열 가지를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닌가. 제작 시스템의 부재를 한탄하는 투정은 차치하고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해선 눈물겨운 제작비 확보 투쟁부터 감내해야 한다. 제작비 투쟁이라 하니 중앙의 방송 PD들 귀엔 무슨 거창한 금액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 실상은 참으로 딱하다 못해 애처로운 수준이다. ‘쥐꼬리’, ‘병아리 눈물’, ‘벼룩의 간’, ‘새 발의 피’ 이런 관용어들이 왜 생겼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만큼 지역PD들이 체감하는 제작비의 규모는 남들에게 알리기 민망하고 열없기까지 하다. 전쟁터에 나왔는데 총이 없는 격이랄까. 가끔씩은 내 사비를 모아서 제작비에 털어 넣고 싶은 애사심까지 발휘될 정도이다. 눈물겨운 제작비 확보 투쟁의 와중에 위아래 동료들과 감정이 틀어지고 다른 부서원들의 눈총을 받는 일을 몇 해쯤 겪다보면 어느새 모든 기획과 상상은 내면의 자기검열에 따라서 딱 쥐꼬리만큼의 크기로 줄어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드디어 회사가 요구하는 유능한 사원이 되는 순간이다. 요령을 터득한 중견이 되고 상상력을 잃은 생활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정말 전쟁터가 전원이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일까? 그런데 비가오고 바람이 불면 돌아눕는 밤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선사들의 어록 중 가장 극적인 가르침으로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꼽는 이들이 많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죽이라는 이 무섭고도 날카로운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본다. 사장을 만나면 사장을 죽이고 국장을 만나면 국장을 죽이고 방송을 만나면 방송을 죽이며 젊은 날들을 나름 시퍼렇게 살아왔다. 이제는 나와 우리 모두를 다시 죽일 때가 온 듯하다. 전쟁터의 포성이 자장가로 들리고 매서운 칼바람도 피부를 둘러싼 포근한 옷처럼 느껴지는 이 익숙함을 죽여야 한다. 낯 섬으로 거듭나야 하고 불편함으로 세포들을 깨워야 한다. 지역이 갈 길이 이 길이다. 지역은 앞으로도 영원한 전장이기 때문이다. 전원은 없다. 지옥 같지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변방이 바로 지역이다. 완성되지 않았고 넉넉지 않기 때문에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수많은 미션들이 존재하는 가슴 설레는 이곳이 지역이다.

다시 변방의 북소리가 들려온다. 들불처럼 중앙으로 번져서 결국에는 천지에 울려 퍼질 천둥 같은 북소리가...

 

▲ 김욱한 포항MBC PD

포항MBC PD인 필자는 술과 썸타면서 방송과 연애하고 또 책과 밀당 중이다. 최근엔 사업과 씨름하고 있다. '변방에서 낮게 나는 부엉이'라는 닉네임을 20여년째 스스로 즐겨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 부엉이로 부화하지도 못하고 날아보지도 못한 둥지 안의 알로 살아가고 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