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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윤이상 탄생 100년, 이제 자랑스런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PD저널=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윤이상(尹伊桑, 1917~1995)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이어졌지만, 우리는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독일에 머물던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동베를린 간첩단’으로 조작된 사람, 조국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비운의 음악가. ‘20세기의 세계 5대 작곡가’에 따라다니는 이 기억들은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 그의 인간과 음악을 질식시킨 분단과 냉전의 사슬에서 그를 풀어주지 않는 한 그의 음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지난 봄, 햇살 따뜻한 남쪽 통영의 푸른 바다에서 그를 느낀 적이 있다. 기념관 홀에 선 채로 <낙양>의 아득한 선율에 한참 마음을 맡겼다. 39살 때 독일로 떠나서 78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국땅에서 보낸 세월 내내 아름다운 고향의 소리는 그의 마음에 사무쳤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거리와 생가, 심지어 음악제에서 그의 이름을 지울 것을 강요한 야만의 레드 콤플렉스, 그것이야말로 분단과 냉전이 낳은 가장 깊은 적폐 아닐까.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만든 사람은 박정희였다. 1964년, 박정희가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환영행사에서 본(Bonn) 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낙양>(洛陽)을 연주했다. 이어진 커피타임, 뤼프케 서독 대통령이 좌중에게 윤이상을 소개하자 박대통령은 아무 표정도 없이, 한마디 말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윤이상, 박정희, 뤼프케의 순서로 자리가 배치됐는데, 음악에 식견이 있던 뤼프케 대통령은 박정희를 가운데 두고 윤이상을 향해 자꾸 <낙양>에 대해 얘기했다. 박정희는 그 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윤이상과의 첫 만남을 불쾌하게 여긴 게 분명하다. 4·19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은 5·16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 두 사람은 아무래도 서로 좋아할 수 없었다.

불길한 첫 만남은 3년 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됐다. 1967년에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렀는데,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고문에 굴복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책상 위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강타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서 벽에 유언을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인류의 지성과 문화를 부정하는 한국 군부의 폭거에 세계의 음악가들이 팔을 걷어붙였고 박정희는 윤이상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윤이상(尹伊桑) 작곡가(1917~1995) ⓒ뉴시스 

윤이상은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 진정한 예술가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며, 온몸으로 끌어안고 내적으로 성숙시켜 예술로 꽃피운다. 윤이상은 5.18의 참상을 듣고 몸부림치며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7년에는 남쪽 시인들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평양에서 초연했다. 고향 땅을 밟고 싶었고, 음악으로 민족을 하나되게 만들고 싶었지만 전두환 군부정권은 그의 입국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윤이상은 방한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총리는 “지난 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것, 앞으로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 윤이상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는 꼴이었다. 이리하여 윤이상이 고향땅을 밟을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그는 이듬해, 1995년 11월 3일, 머나먼 이국 땅 베를린에서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그를 너무 몰랐다. 무엇보다, 그를 분단의 감옥에 가뒀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땅에서 유배된 예술가, 분단의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한의 한반도를 끌어안고 울부짖은 윤이상…. 그를 레드 컴플렉스에서 풀어주기 전에는 우리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윤이상 탄생 100년, 이제 자랑스런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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