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당신이 기억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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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신지혜 시네마토커(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병수.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딸 은희와 단둘뿐인 그는 수의사이다. 작은 도시에서 평범하고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는, 연쇄살인범이다. 아니, 이었다.

가족에게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 분출하지 못하고 쌓여오던 분노와 억눌린 울분은 병수로 하여금 아버지의 목숨을 앗게 만들었고 이후 그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되는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남몰래 은밀하게 혼자만이 모든 것을 짊어진 채.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은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을 구하고 인간말종을 청소한다고 생각했다.

15년 전 그 날, 마지막 살인을 저지른 그는 더 이상 '청소'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득 문득 떠오르는 여자의 얼굴이 그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는 지금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오래 전 사고로 뇌에 손상이 갔는데 그것이 점점 그의 뇌를, 그의 기억을 잠식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제는 점점 증세가 심해져 병수 그 자신도 두렵다. 이러다가 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기억을 잃어가다가 무슨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그런 그의 앞에 딸의 남자친구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아, 안된다. 그는 나와 같은 눈빛을 가졌다. 그는 살인자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를 앓는 전직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그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플롯이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각색에 공을 들였고 또 한편의 '기억'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기억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에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상당히 무겁고 절망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모든 기억은 조금씩 왜곡되어 저장되기 마련이지만, 인간은 그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들고 추억하며 자기자신을 이루고 있는 일련의 시간과 경험치를 자각하면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인지하게 된다.

▲ '살인자의 기억법' 공식포스터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의 레이첼에게 연민이 생기고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의 청소부가 절망적인 것이다. <메멘토 memento>의 주인공이 안타까운 이유, <스틸 앨리스 still alice>의 그녀가 한없이 슬퍼지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자들이 심어진 기억, 왜곡된 기억으로 자신의 존재가 흔들려 휘청했다면 후자들의 영화는 빠른 속도로 잃어가고 지워진, 끼워 맞출 수 없는 시간의 조각들로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는 것이다.

병수, 그의 경우는 그래서 더 특별해진다. 일면 목숨을 살리는 수의사로 다정하고 건실한 아버지로서의 시간과 경험치를 쌓아온 그. 그의 기억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채워져 있을 것이다. 다른 면을 보면 그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이 몇 명의 목숨을 빼앗은 연쇄살인범. 그의 기억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채워져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기억들이 위태롭게나마 저마다의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고 흘러들어가면서 그 자신 어떤 기억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눈빛을 가진 남자를 만났고 게다가 그는 (병수의 시각으로 볼 때) 분명히 어떤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은희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동물적인 감각이 알려주고 있으니 병수는 조급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기억이란 사실 상당히 왜곡되기도 하고 어릴 때의 꿈이나 상상을 그 자신의 기억으로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시간대의 강렬하고 특별한 경험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유사한 경험치로 각인시키기도 하는 것이니 백퍼센트 완전하게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자기자신의 기억임을 떠올릴 때 우리는 병수와 함께 그의 기억 – 왜곡된 혹은 아직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조바심이 나고 비명을 터뜨린다.

그가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보조수단으로 마련한 것은 다름 아닌 일기이다. 기록은 기억과 다르게 비교적 온전한 경험치를 보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기록의 의도된 왜곡과 기록의 의도된 첨삭을 간과할 수 없고 병수의 일기는 바로 그렇게 이용되면서 또 한 번 우리는 병수의 시간과 경험 속에서 나뒹굴게 된다.

당신의 기억은 당신의 어떤 부분을 말해주고 있는지. 당신의 기억은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지. 문득 수면위로 떠오르는 기억들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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