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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음 세상 ⑫] 눈 밟는 소리

▲ 눈 밟는 소리를 녹음하고 있는 모습 Ⓒ'유지방'

[PD저널=안병진 경인방송 PD] 눈 쌓인 길을 걷는 발과 마이크. SNS에 올라온 한 줄의 글과 사진. 이것이 왜 나의 눈길을 이토록 끌었는가. 다시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었다.

주변 소리를 모두 흡수하며 내리는 눈. 먼 곳의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밤. 동네 산책.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모두 있기 때문이었다. 눈 내린 밤에 그 소리를 녹음하는 순진한 모습.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마당에서 눈을 밟으며 짓던 소박한 웃음이 떠올랐다. 간결한 글과 사진을 보고 있자니, 눈 밟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운드엔지니어 '유지방'. 며칠 후 나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였다. 방송통신위원회 산하 시청자미디어센터가 인천에 개관하면서, 라디오 제작 수업을 맡을 강사를 찾다가 제안이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말도 잘 못하고 남 앞에 서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지라, 거절을 했다. 하지만 당시 회사에 계시던 본부장과 인연이 있던 곳이라 도와달라는 부탁이 계속되어, 결국 내가 맡게 되었다.

수업은 시민들에게 라디오를 어떻게 제작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뭘 가르칠까. 수업에 참여한 수강생들과 프로그램을 하나 만드는 걸로 대충 방향을 정했다. 중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열대명의 수강생이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매주 나의 횡설수설이 이어졌다. 개중에 아는 얼굴이 있어 더 곤혹스러웠다. 그러다 누군가 각본을 쓰고 누군가는 더빙을 하고 누군가 내레이션을 맡고, 누군가는 또 연출을 맡아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며 수업이 끝나는 걸로 방향이 정해졌다. 모두 처음 해보는 거라 재미는 있었지만, 어딘가 또 학예회 발표장 같았다.

음향을 맡기로 한 누군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방송사에도 없는 효과음향을 가져왔다. 유지방이었다. 심지어 프로툴(Protools)까지 편집을 척척 해냈다. 애들 체육대회에 갑자기 학부무가 선수로 등장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 때만해도 '유지방'은 지금처럼 살이 찌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뭐하시는 분인데, 여기서….”

“포스트 사운드 일을 좀 해요. 팟캐스트를 하고 싶어서 수업을 들어봤어요.”

그의 목소리는 높고 상냥했다.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처럼 비상하는 들뜬 목소리.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항상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그는 빠르고 영민하게 답을 두 번씩 들려주었다. “네네.”

내 말투는 내가 들어도 싸가지 없이 내뱉는 말투다. 왜 그런지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서 도저히 고쳐지지가 않는다. 말도 별로 없는 편인데, 한 번씩 말하는 게 이래서 나는 뜻하지 않게 곤욕을 많이 치렀다. 어려서는 엄마에게 혼이 났고, 지금은 아내에게 혼이 난다. 그래서인지 그의 상냥하고 신뢰감 있는 말투가 언제나 듣기 좋았다.

미디어센터 수업이 끝나고 그를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눈 밟는 소리를 녹음하는 그의 사진을 보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소리’로만 여행을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때였는데, 그것을 실현시켜줄 동시녹음 엔지니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서라운드의 개념도 잘 모르고 있었다. 녹음이라고 해봐야 소리가 나는 곳에 마이크를 갖다 대면 다 되는 줄로만 알았다.

“요즘 뭐하세요? 뭐 좀 의논할 게 있는 데 한번 만날까요?”

오랜만에 그를 만나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는 것에 한번 놀라고, 불어난 그의 몸에 다시 놀랐다. 몇 해 사이 그에겐 배우자가 생겼고, 몸도 두 배가 되어 있었다.

“나의 유지태가 되어 주세요.”

“네?”

“나는 이영애이고 당신은 유지태입니다.”

“네에?”

“섬에서 소리를 녹음하고 싶습니다. 사운드로만 여행을 하는 겁니다. 라면은 잘 끓여요.”

둘이 술을 많이 마셨다. 그는 밴드에서 기타를 쳤었고, 일어를 전공했다. 사운드 엔지니어를 하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왔다. 얌전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어딘가 끝을 보고 싶은 오기가 있음이 느껴졌다. 내게 감성적인 라디오의 매력을 보여준 두 편의 영화 <일 포스티노>와 <봄날은 간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백령도에서 두무진 소리를 녹음하고 있는 사운드맨. Ⓒ'유지방'

‘작은 파도’, ‘큰 파도’, ‘신부님이 치는 교회의 종소리’, ‘내 아버지의 슬픈 그물 소리’, ‘밤하늘 별들의 소리’ 섬의 아름다운 소리를 녹음해 시인 네루다에게 들려주려는 우편배달부. 소리로 담을 수 없는 것까지 담아내고 싶었던 그가 사실은 시인이라고. 그런 소리까지 담을 수 있겠냐 횡설수설을 했다.

그 해 나는 '유지방'과 인천의 여러 섬을 함께 다녔다.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 무덤덤하지만 순박한 사람들. 소리로는 담을 수 없는 말이 없는 풍경들. 처음엔 모든 걸 소리로 표현하기 위해 애를 태웠지만, 기도하듯 묵념에 잠긴 자연을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요즘엔 '유지방'과 나는 도심을 다니며 녹음한다. 기대했던 소리가 나지 않는 곳에서 유지방은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본다. 묵상하는 자연과는 다른 침묵의 강요. 사운드맨의 비극이다. 세상이 점점 무소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얼마 전 영화 <봄날은 간다>를 다시 보았다. 들판에서 유지태가 홀로 녹음하는 마지막 장면. 사랑했던 여인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자연의 소리로 덮어 쓰는 거였다. 녹음이 동시에 지우는 행위라는 걸 10여년 만에 알게 됐다.

“유지방 씨. 우리는 디지털 녹음이니까 덮어 쓸 것도 없고…, 저기 부탁 하나 할게요.”

“네. 뭐죠?”

“절대 살 빼면 안 됩니다.”

“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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