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비콘, 평온한 마을에 닥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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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버비콘, 평온한 마을에 닥친 비극
1950년대 미국 중산층 풍자한 부조리극
  • 신지혜 시네마토커(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 승인 2018.07.25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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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버비콘> 스틸컷.

[PD저널=신지혜 시네마토커(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진행)] 1950년대 말. 미국 중산층을 겨냥해 팜플릿이 뿌려진다. 이상적인 가족 구성원, 경제적으로도 윤택하고 삶에 여유가 있는 당신은 이 곳, 서버비콘에 와서 살아야 한다고 광고한다. 그렇지, 이런 마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모여들어 타운을 채운다.

모두들 환하고 밝은 표정에 입가에는 미소를 걸고 있고 날마다 우편물을 가져다주는 배달원은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다. 깨끗한 도로에는 휴지 조각 하나 없고 예의바르고 귀여운 아이들이 마당을 뛰어 다닌다. 집집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고 내리쬐는 태양과 상쾌한 공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더해주고 있다. 앞으로 이 곳, 서버비콘은 더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점점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 되리라.

그런데 이토록 이상적이고 균형 잡힌 서버비콘에 두 가지 사건이 터진다. 하나는 흑인 가족이 이사를 온 것이다. 백인만 입주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둔 것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녹아있는 ‘우리’의 범주에는 흑인은 들어있지 않았는데, 그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그들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우리’가 되려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드너의 집에 강도가 들어 안주인 로즈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평온만이 흐를 것 같던 서버비콘에 불온하고 무거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하고 이 두 사건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은 엄청난 파동을 일으키게 된다.

코엔 형제가 각본을 썼다니 편안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코엔형제의 장면들은 분명 웃음이 터져 나와야 마땅한 장면인데도 웃을 수 없는, 오히려 위장 한 구석이 뒤틀리는 불편함을 주니까 말이다.

조지 클루니가 연출을 했다니 일면 기대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잘생긴 얼굴을 소비하며 스타로 살아가도 충분한 그이지만 그는 언제나 배우가 되려고 노력했고 양질의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왔으며 어느 정도의 재능 또한 담보된 사람이니까. 더구나 줄리안 무어와 맷 데이먼이란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

그런데 시놉시스를 읽자마자 눈앞에 이미 영화의 분위기와 전개가 그려진다. 이런 식의 틀을 갖는 영화는 뻔하다. 더구나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화라고 하니 웬만큼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2018년 지금의 대한민국 제주도에 상륙한 난민의 이야기를 한다. 혹자는 코엔형제가 주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혹자는 뻔한 이야기이지만 새롭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맞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늘 변주되는 콘텐츠를 다시 접하는 이유는 그 시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을 통해 치우지지 않는 관점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현재를 비추어보며 조금 더 나은 우리들이 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니까.

거기에 하나 더 생각을 얹어본다면 ‘우리’라는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경쾌하게 수놓는 서버비콘의 광고는 정말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완벽에 가까운 조화. 서버비콘이 주는 이미지는 그러하니까. 그리고 그런 마을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끼게 할 만 하지 않은가. 그 멋지고 친절한 양질의 사람들과 내가 ‘우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다. 스스로 우리라는 틀 속에 갇히게 될 때 그것이 얼마나 큰 독선이 되고 무자비함이 되고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 <서버비콘>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종으로 횡으로 그 파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흑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우리’는 그들을 내쫓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점점 몰상식한 행동을 보인다. 서버비콘을 횡으로 물들이는 그 폭력성은 제3자인 관객의 눈으로 보기에는 얼토당토않은 일이지만 실제로 내가 그 일원이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런가하면 안락하고 평온해보이던 가드너의 집에 닥친 불행은 서버비콘을 종으로 파고든다. 겉으로는 그 어떤 불길함과 위험성을 감지할 수 없었지만 그 문 안에 살고 있는 가드너는 마가렛과의 관계를 위해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범죄의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찾아온 보험조사관과 어린 아들의 뜻하지 않은 목격과 진술로 균열을 맞게 된다.

역시 제3자인 관객의 눈으로 볼 때는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나는 가드너의 행동이 불쾌하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미 욕망으로 눈이 먼 가드너는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버비콘은 파국의 종말을 향해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이 부조리하고 극악한 서버비콘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생각했던 ‘우리’란 과연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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