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할퀴고 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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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할퀴고 간 자리
[비필독도서 ①] '폭염사회'
  • 오학준 SBS PD
  • 승인 2018.09.10 1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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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서였던 지난 7월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인근 도로에 지열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있는 가운데 차량들이 지나가고 있는 모습.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우리 모두가 1995년 여름 그토록 많은 시카고 주민을 사망하게 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죽음이 간과되고 잊힐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고 있다.”

무더위의 한가운데 있던 8월의 어느 날, 나는 온열 질환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다룬 기사들을 읽게 됐다. 그들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단어들이 기사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막노동꾼, 외국인 노동자, 쪽방, 선풍기, 전기세와 같은 단어들이 그들이 속한 계층이 어디인지를 드러냈다. 아무리 더워도 쉬지 못하고 그늘 한 조각 빌릴 수 없었던 사람들, 더위 속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었다.

자연 재해는 사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위험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 더위는 커피숍 유리창 너머에 쏟아지는 햇살처럼 잠깐 불편할 뿐인 현상이겠지만, 위험해도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저소득층 노동자나, 거동이 불편해 더운 방을 벗어나지 못했던 장애인이나, 가족들이 모두 떠나버려 연락할 사람이 없던 은퇴한 노인들에게 더위는 ‘사신’과도 같았다.

언젠가 도시가 또 찜통이 되면, 사람들은 올해 여름을 언급할 것이다. 1994년 여름을 되새김질 하듯이. 그만큼 길고 잔인한 여름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고통의 흔적은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폭염이라는 재난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째서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더웠던 날들을 한낱 이야깃거리로 소비해버린다면 말이다.

1995년 여름, 시카고를 뒤덮은 일주일간의 폭염도 그랬다.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별 것 아닌 사건”으로 간주됐다. 정치가들과 언론은 사망자들의 개인적 실수를 들춰내고 이례적인 자연의 힘을 경탄하는 데 힘쓸 뿐이었다. 지면과 기관의 발표 그 어디에도 그들의 죽음과 사회의 실패를 연관 짓는 분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폭염사회>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이 지점에 주목했다. 2002년에 발표한 <폭염사회>에서, 저자는 폭염 앞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참사의 인간적 차원’을 명확히 해야, 이후에 닥칠 또 다른 폭염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르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치밀한 모색의 결과 책의 두께는 조금 두껍지만 내용은 비교적 간결하다. 희생자들이 거주했던 지역의 인종, 계급, 치안에 대한 통계 자료들을 분석해, 저자는 폭염이라는 자연 재해에 더 많은 피해를 입는 취약 계층이 누구인지를 찾아낸다. 에어컨을 켜지 못했던 사람들, 공공시설을 이용하지 못했던 사람들, 빈번한 총격에 안전한 고립을 선택했던 이들, 모두 가난하고 고립된 ‘주변부’의 사람들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폭염이라는 위기는 “일종의 사회극이며, 늘 존재했지만 알아채기 어려웠던 일련의 사회적 조건을 드러낸 사건”이다. 폭염은 정치적 주변부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피해를 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사회 구조의 오류들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주변부 일부에만 위기로 닥치는 재난의 한정적인 성격 때문에 정치적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폭염 피해는 쉽게 비가시화될 수도 있다.

사회의 실패를 전면으로 드러내느냐 가라앉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언론과 정부인데, 그들이 사회 구성원에게 사태를 알리고 대책을 촉구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언론과 정부가 폭염이라는 재난을 어떻게 다루어가는지를 한 장이나 할애해가며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시카고에서 벌어진 일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재난의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손쉽게 피해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정치인들은 빠르게 희생자들은 ‘손절’할 수 있었다. 언론은 문제점을 조명하는 대신,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불쾌하지 않은 기사들을 양산하며 돈을 벌었다. 비록 재난을 일으킨 사회적 조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지만, 더 많은 매체와 정부가 재난을 스펙터클하게 재현하는 동안,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2018년의 폭염은 다른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시카고의 폭염과 크게 다른 대우를 받을 것 같진 않다. 서울시가 발간하던 폭염 백서는 2015년 이후로는 자취를 감췄다가 이례적 폭염이 지나간 후에야 부랴부랴 발간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정부가 홍보한 무더위 쉼터는 접근성이 개선되지 않아 여전히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그 사이 언론도 희생자들의 삶을 추적해 사회적 부검을 시도하는 대신 식재료를 익히는 데 조금 더 몰두했다. 재난 앞에 기자를 노출시켜 스펙터클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건 잘 했지만, 40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분석해 취약한 사회의 윤곽을 더듬는 일은 응급외과 의사보다도 게을렀다.

재난이 단순한 흥밋거리가 되면 공동체는 미래에 닥칠 똑같은 재난에 제대로 대응할 기회를 잃는다. 정부든 언론이든 재난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윤곽을 명료하게 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재난은 언제든 약자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무너진 토사 앞에서 브리핑하는 소방대원에게 자리 똑바로 잡으라고 소리치는 대신에, 대책 마련에 소홀한 정부 관계자의 면전에 소리치기를 요구하는 건 무리한 일일까.

무더위의 끝자락에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읽게 된 것은 책 말미에 적힌 이 문장 때문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재난이 과거로 흘러가면서 훌륭한 보도와 치명적인 위기를 불러일으켰던 역사적 사건은 뉴스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조금 긴 호흡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느 한 주간지는 특집 기사로 폭염의 사회적 부검을 시도했다. 태생적으로 느리고 긴 호흡일 수밖에 없는 방송사 PD는 폭염이 할퀴고 간 상처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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