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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수자(少數者)의 촛불

|contsmark0|오랜만에 마련한 여의도초대석에 인권운동가 서준식 씨를 초대했다.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그의 형 서승과 함께 지난 71년 투옥됐던 서준식 씨. 그는 88년 1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후 ‘인권운동’에 몸을 던졌고, 이제는 ‘인권운동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연합회 사무처장 박종성 pd가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인 그를 만나 ‘인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었다. <편집자>
|contsmark1|“…보나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보나는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완전히 미술사상의 패자 무리 속에 파묻혀 버렸다. 비정하다고 할 만큼의 콘트라스트이다.…인상파 아니면 해가 뜨지 않는다는 일본에서는… 보나 같은 화가를 누가 쳐다보기나 할 것인가.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나는 평가나 명성이 정해진 것만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며 만족해하는, 뒤집어 놓은 공식주의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결국 싸움의 승패가 끝난 뒤에야 승자 편에 가 붙는 꼴이 아니고 뭔가…” -서경식 저 ‘나의 서양미술 순례‘ 중에서. 서준식. 1948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 교포 3세로 태어남. 민족차별 속에서 성장, 고교를 졸업하고 68년 서울유학, 사회과학 심취. 71년 서울 법대 4학년 재학중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 그의 형 서승과 함께 투옥됨. 78년 7년 형량을 마친 후에도 사회안전법에 따라 10년을 더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보냄. 88년 구금 17년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석방됨. 이후 10년간 인권운동가로 활동중.첫머리에 인용된 글을 쓴 서경식은 서준식의 친동생이다. 그가 유럽의 한 미술관에서 당대의 예술적 관습을 충실히 따랐던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제도권’ 화가였던 레온 보나와 그 반대편에서 민중의 삶과 빛을 주제로 다양한 반역을 꾀했던 밀레, 도미에, 모네, 고호, 고갱 등 ‘재야’ 화가를 동시에 돌아보며 쓴 이 글에는 그가 사랑하는 형의 삶이 그에게 준 암시로 가득 차 있다.한 시대의 어두움에 굴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이 어느 순간 공개될 때, 그 아름다움은 일출의 그것에 비견할 만하다. 감방 깊은 곳에서 숙성된 신영복의 입자 치밀하고도 결고운 정신은 대중 앞에서 보석처럼 빛을 뿜었고 머나먼 파리에서 날아온 망명자 홍세화의 편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그리운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과 마찬가지로 젊음을 감옥과 격리 속에서 보낸 서준식에게 어두움은 아직도 그를 옥죄고 있는 보호관찰법처럼 끝나지 않고 있다. 승자가 되기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그 자신이 맹렬하게 또 다른 공식으로 치환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인가. 작년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당국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은 영화 ‘레드헌트’를 상영했다는 죄목으로 그는 다시 투옥이라는 어두움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표현의 자유 억압’ 논란은 그가 몸으로 보여주는 어두움 혹은 어두움을 증명하는 그의 몸을 설명하기엔 어쩌면 너무나 고답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그가 운영하는 인권운동사랑방은 대학로 부근에 있었다. 웃음과 햇살과 꽃잎이 날리는 거리에서 그는 어두움을, 그것이 엄존함을 외치고 있었다. 진실을 찾기 위해 대낮에 촛불을 들고다녔다는 옛 그리스의 현자처럼. 암묵적으로나마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면 한 시대의 어두움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방법적으로는. 지난 시절이 어두웠노라고 술회하는 일 또한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이토록 밝은 세상에서(!) 그가 벌이는 인권운동, 그가 켜든 촛불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일은 방법적으로 지난하고 때때로 감옥에 갈 만큼 위험하다.(88년 출옥 이후에 그는 두 번 감옥에 갔다왔다. ‘레드헌트’ 사건 말고 다른 한번은 ‘강기훈 유서대필조작’ 사건이었다.) 여태껏 밝은 곳만을 골라가며 살아온 ‘기득권언론’의 종사자로서 그와 인터뷰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표시해야 할 아주 작은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contsmark2|- 레드헌트 상영 금지와 투옥에 대한 생각은…?“내 수감의 이유는 상영허가가 나지 않은 레드헌트를 상영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 정도로는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지속적인 보안관찰대상이라는 데 있다. 보안관찰대상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국가보안법에 걸 수 있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행해진 공안몰이의 하나였다고 본다.” - 그 말은 당신의 수감이 단지 표현자유의 억압이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인가?“결과적으로 나타난 모습은 표현자유의 억압이겠지만 보다 구체적인 원인은 그때까지 내가 주장해온 내용에 있는 것 같다. 나는 96년 한총련 사태 이후에 진보운동에 있어서 폭력사용은 무모하며 그렇다고 체제내화된 적법한 운동 역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대안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다.”- 비폭력 불복종운동이라면?“간단히 말해 옳은 말 옳은 주장에 대해 몸으로 증거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악법이 있다면 악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법을 몸으로 어기자는 것이다. 악법을 어겨 감옥에 가자는 것, 그렇게 해서 악법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당국의 눈에 상당히 불온한 것으로 비친 듯하다.”- 인권운동과 영화의 관계는?“영화는 잘 모른다. 독립영화의 경우 (웃으며) 우리는 서로서로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인권)영화(제)가 ‘인권’이라는 용어의 보급에 기여했다고 본다. 사실 이전의 민주화 운동에서 인권이라는 말이 독립된 장르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민주화’, ‘정권교체’ 같은 거대 담론에 종속되어 있었거나 가려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인권운동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엄밀히 말해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피해자’였지 ‘인권옹호자’였던 적은 없다. 그런데도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보는 시각이 문제다.”- 인권운동의 큰 적은 이제 권력 자체보다도 대중들의 무관심이 아닌가. 인권영화제만 하더라도 동시에 열렸던 부산 국제영화제에 비해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그렇게 볼 수 있다. 돈 문제도 역시 어려운 문제이다. 인권운동 활동비를 기업이나 정부의 돈에 의지할 수도 없는 일이고 모금을 할 경우에는 어차피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일을 벌여야하는데 대중적 관심도 좋지만 우리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해야할 게 아닌가. 인권운동이 어려운 것은 인권의 개념 때문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의 이념은 한번도 실현된 적 없고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의 지배계급 의지에 따라 달리 규정되어 왔다. 이를테면 동구의 몰락 후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의 인권은 자본주의적 시민권 개념으로 정의된다. 복지, 여성지위, 노동자의 보호받을 권리 같은 사회권은 경시된다. 따라서 위기 시에 노동자의 권리는 항상 희생된다. 인권의 보편성에만 매달리다 보면 그것에 기만당한다. 인권의 개념을 보다 진보적인 것으로 바꾸어 가는 일, 그게 어렵다. 우리나라 어떤 재야단체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한 인권운동은 그 지향점보다도 개개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솜씨, 행동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까지 삶을 비주류 소수자로 일관해왔는데….“88년, 17년만에 출옥하면서 가졌던 나의 희망은 단 1년간만 뒤에 남겨진 장기수와 사회안전법 철폐에 관한 운동을 하고 그 이후로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소수자는 한 사회의 모든 모순을 몸에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소수자의 희생 위에 통합된다. 나에게 있어 다수자, 주류에 선다는 것은 그 사회의 모순을 체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몸으로 사회를 증언하는 것이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소수자, 비주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신에 대한 보안관찰은 언제 끝나나?“내가 국가보안법에 반하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에 별일(?) 없으면 2년마다 갱신될 것이다. 현 법무장관이 야당 시절에 보안관찰을 철폐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그를 만나고 나오는데 쟝 꼭토의 말이 생각났다. ‘시인은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한 무리의 군중 속에서 홀로 우뚝 멈춰 서 있는 자이며 일종의 저주받은 고독이다.’ 그가 몸을 비유삼아 시를 쓰는 시인 같다고 생각했다.어떤 이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에 기초하고 있고 어떤 사람의 권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박탈이 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남들보다 먼저 깨닫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하는 순간에 느끼는 고독은 분명 저주스러울 만큼 무서울 것이다. ‘소수자’가 끝내 ‘소수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봄날의 토요일 오후, 대학로는 밝은 표정과 행복한 웃음을 연신 터뜨려대는 사람들로 흘러 넘쳤다. 그 사이에서 그가 켜들고 있는 작은 촛불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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