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조연출의 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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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연초 특집으로 정신없는 제작 현장...떡국 대신 순대국으로 새해 맞는 웃픈 현실

▲ MBC 연말 특집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MBC

[PD저널=허항 MBC PD] 다시 연말이다. MBC 예능본부는 가요대제전, 연예대상, 연기대상, 이른바 ‘연말 3형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분위기이고, 각 프로그램들도 연말 연초 특집 등을 준비하며 2018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가 중에 있어 올해의 끝 날과 내년의 첫 날을 제작 현장이 아닌 집에서 맞이할 수 있게 됐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생각해보니 이런 상황이 PD 인생 10여 년 중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다른 분야의 PD들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되는데, 특히나 예능PD들은 주로 편집실이나 녹화장, 촬영장에서 연말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매년 12월 31일에 개최되는 MBC 가요대제전 연출과 조연출, 현장지원 PD들은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새해 카운트다운이 잘 나가는지 보다가 비로소 본인들이 한 살을 더 먹었음을 깨닫는다.

레귤러 프로그램 조연출들은 새해 첫 주에도 어김없이 제시간에 방송될 프로그램 가편 시사를 위해 편집실에서 밤을 새우다가, 부지불식간에(?) 새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연출 시절 1월 1일 새벽, 가족들 대신 옆방 조연출 동료들과 떡국 대신 순대국으로 나름의 새해맞이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바닷바람이 칼 같았던 어느 지방 촬영장에서 우연히 새해 첫 일출을 보고 기분이 묘했던 순간도 있었다.

비단 연말 연초 뿐이랴. PD에게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도 그저 제작 기간 중의 하루에 불과할 때가 많다. 입사 초기에는 크리스마스 때 어떻게든 친구들과 명동이라도 들렀다가 편집실로 들어가겠다고 오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 모임에서 나는 ‘어차피 시간 안 되는 애’로 분류돼 연락조차 오지 않는다. 출근길이 이상하게 한산하길래 문득 달력을 보니 추석 연휴 첫 날이어서 당황했던 적도 있다. 가족들 역시 언젠가부터는 추석이라고 연락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예능 PD들끼리는 자학성 개그로 승화해 웃으며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얼굴 모르는) 수많은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가족 친구들과 휴일을 보내는 즐거움을 매년 놓치고 사는 PD들의 현실이 문득 웃프다.

정신없는 프로그램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지금에서야 오롯이 느끼는 연말의 거리 분위기, 그리고 모처럼 소파에 시청자 모드로 앉아 보게 되는 각종 시상식들. 그 앞에서 새삼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제 52시간 근무제 도입 등으로, 과도한 노동을 지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시청자들이 쉴 때 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즐거움을 선사해야 하는 예능 PD의 숙명은 아마 바뀌기 힘들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들보다 조금 길고 힘든 조연출 기간을 보낸 탓에 예능 조연출 후배들이 유난히 더 눈에 밟힌다. 프로그램 전체적으로 볼 때, 조연출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위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많은 노동을 해야 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에 가장 설레는 나이인 20대 후반~30대 초반에 연인보다는 편집기와 보내는 시간이 많은 그들은, 업무 특성상 사생활과 제작 스케줄을 구분해 생활하기 힘들다.

이 글을 쓰는 일요일 밤 현재에도 편집실에서는 ‘연말 3형제’ 조연출들이 시상식에 틀어질 영상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에도 생방송‧녹화‧ 편집 현장에서는 담당 조연출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다. 집밥보다는 배달 음식이 익숙한 버라이어티 조연출들은 제때 끼니는 잘 챙겨먹으며 일하고 있을까. 휴일이라 평소 시켜먹던 밥집이 문을 닫아 당황할 막내 조연출의 전화기에는, ‘엄마’라고 찍힌 부재중 전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PD의 길을 선택한 것은 본인들이고, 이 업에서 떠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연말과 명절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연한 바람 하나가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펼쳐질 각종 연말 시상식과 한결 더 윤색될 레귤러 프로그램들, 밝은 조명을 한 몸에 받게 될 올해의 연예인들, 그들 뒤에 무명의 조연출들이 반납한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잠깐이라도 기억됐으면 좋겠다. 가족‧연인과의 시간, 밤잠, 건강 같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말이다.

물론 시청자들이 제작진의 고생 하나하나를 공감해줄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단, 동료들끼라라도 "고생 많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메시지 한줄 쯤 나눌 수 있는 연말이 됐으면 좋겠다. 요즘 부쩍 얼굴보기 힘든 조연출 후배들에게 지금 바로 ‘카톡’이라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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