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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이 내게로 온날 41] 병원에서도 뒷마당 채소 걱정하는 팔순의 노모

[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나는 효심이 얕고 정성이 부족해 효녀가 되지 못한다. 정신노동이 심해 되도록 가사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효도를 하려면 노동력이 증대되어야 하는데, 체력이나 시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변명 일색이다.

남원에 사시는 팔순의 친정 엄마는 뒷마당에 일 년 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먹거리를 기르고 있어 언제나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 노동이 두렵고 힘들어서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친정 엄마에게 효도하려면 친정에 가서 하루 종일 뒷마당에서 살아야 한다. 무성한 풀을 베거나 철 따라 씨 뿌리고 야채를 심고 가꾸거나 풍성하게 자라난 배추나 무를 뽑아서 김치 담그는 일을 돕는 일 등 비교적 단순한 노동인데 그마저 외면해왔다.

딸은 엄마의 마음을 외면했지만 엄마의 뜰에 자라는 아이들(?)은 한 번도 배신하지 않고 물을 주면 좋아하고 할머니의 발걸음에 따라 고만고만 성장하면서 보은했다. 엄마는 멀리 떨어진 딸보다 가까이에서 할머니 손길을 기다리는 생명들과 교감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는 냉정한 딸보다 다정다감한 뜨락의 아이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지도. 

▲ ⓒ픽사베이

낙엽이 우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 보리라 
(양희은 노래 <부모> 가사 중)

지난 늦가을부터 겨울 사이, 엄마의 뜰은 숨죽이고 있었다. 지난해 추석을 하루 앞둔 일요일 새벽, 엄마는 일생일대 가장 외롭고 힘든 고비를 홀로 감내해야 했다. 노인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라는 대퇴골 골절이었다.

엄마의 말씀을 조합해서 사건을 정리해보면 이랬다.

2018년 9월 23일 새벽 1시 40분경, 윗방 침대에서 주무시던 엄마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나다 넘어졌는데 하필 이동용 옷걸이 바퀴에 심하게 엉덩이를 찧었고 그대로 골절이 되고 말았다. (이동용 옷걸이는 그동안 여러 사람이 위험하니까 치우라고 조언 또는 경고했던 옷걸이인데 사람들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엄마는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전화기가 있는 아랫방으로 기어갔고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전화를 했으나 안타깝게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추석을 앞두고 이틀에 걸쳐 집안 청소와 냉장고 청소를 하느라고 초주검이 되어있었다.) 딸과 통화가 되지 않자 이번에는 둘째 손자에게 전화를 해서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은 할머니가 119도 부를 수 없을 만큼 매우 위급한 상태에 처했음을 알게 되었다.

새벽 2시 20분쯤 나와 남편은 둘째 아들을 데리고 급히 남원으로 향했다. 보조 열쇠로 문을 열고 친정집에 들어서니 엄마는 다리가 꼬인 채로 찬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9월의 새벽은 쌀쌀하다. 방바닥은 선듯하였다. 포개진 왼쪽 다리는 쥐가 나서 저리고 오른쪽 다리는 차가웠다. 어머니는 그 자세로 세 시간 동안 도움의 손길을 기다렸던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엄마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119에 도움을 요청하고 병원 갈 준비를 하는 순간에도 엄마는 손자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영서야, 옥상에 올라가서 고추 말린 것 좀 걷어라잉. 하나는 좀 바짝 마른 것이고 다른 한쪽은 덜 말랐으니께 나눠서 담아야 한다잉. 막내 할머니가 고추 말린 거 좋아하니까 깨끗하게 말려라잉~”

죽을힘을 다해 고통을 참다가 죽을힘을 다해 옥상의 고추를 걷으라고 외치는 팔순 노인네의 살림 걱정은, 효심 부족한 딸을 질리게 했다. “저깟 고추가 뭐라고, 지금 고추 걱정하게 생겼어요?”라고 말해도 공허한 울림으로 돌아왔다.

한술 더 떠서, 팔순 노인은 지금 잠옷 바람이어서 병원 가기가 곤란하니 제대로 된 옷을 입혀달라고 했다가, 앰뷸런스를 부르면 돈이 드니 사위 차를 타고 병원에 가겠다고 우기기도 했다. 남편은 보다 못해 “어머니 잘 못하면 평생 못 일어날 수도 있어요!”라고 어르고 달래 겨우 119 구급차를 타고 도립병원으로 이동했다.

X-RAY 촬영은 예상대로 대퇴부 골절, 당직의사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엄마의 모든 기록이 있는 전주의 종합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19는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 없어 사설 앰뷸런스로 전주로 가는데 그 길은 참 멀고 아득했던 것 같다. 시장통 같은 응급실에 환자를 내려주고 앰뷸런스는 떠났다.

자리를 확보하지 못해 복도 비슷한 곳에 어머니가 누운 침대를 두고 담당 의사를 기다리는데 그 사이 또 한 사람이 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통곡소리가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여보 안 돼! 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50대 후반의 부인은 응급실에서 울부짖었고 남자분의 얼굴 위로 하얀 시트가 덮였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벌어진 상황은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현실을 쉽게 인정할 순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추석 명절을 지내기 위해 모였을 가족은 장례식을 치르게 됐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엄마의 사고로 큰 걱정에 휩싸인 나는 다른 사람의 비극을 보며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 있어도 생사가 갈리는구나. 죽고 사는 것은 눈 한번 깜빡이는 것과 같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같다더니, 생사가 멀리 있지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날 처음으로 ‘비록 환자는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시간이 지나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하면 나아지겠지’라는, 기대 같은 것을 가져 보았다. 넘어질 때 머리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리만 다쳐서 다행이다, 정신이 온전하셔서 다행이다, 그렇게 응급실에 서서 엄마의 상태가 다행인 것에 감사했다.

긴머리 빗어내려 동백기름 바르시고
분단장 곱게하고 내 손잡고 걸으실 때
마을어귀 훤했었네 우리 어머니
여섯 남매 자식걱정 밤 잠을 못 이루고
칠십평생 가시밭길 살아 오셨네
천만년 사시는 줄 알았었는데
떠나실 날 그다지도 멀지 않아서
막내딸은 울었답니다.
(이효정 노래 <우리 어머니> 가사 중)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지만, 추석 연휴와 엄마의 병력 때문에 입원한 지 12일 만에 수술을 했다. 그로부터 2주 후에 종합병원에서 퇴원하고, 재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 사이에도 엄마는 통증보다 남원 집에 두고 온 온갖 것들의 걱정과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더 아프게 지내셨다. 주말마다 남원 집에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을 버리고, 치울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치웠다. 엄마는 텃밭에 가서 호박을 따오라고 했고, 부추를 베어다가 누구누구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고추도 따야 한다고 했고 곧 감을 따야 한다고 걱정을 가불 하셨다.

엄마의 손길이 멈춘 텃밭은 슬슬 무질서하게 밀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병석에 계신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하자고 텃밭에 들어갔다가 벌에 쏘이고 모기에 물렸다. 그나마 눈에 보이는 호박 한 덩어리를 건졌을 뿐, 고추를 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차라리 시장에서 사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편할 것 같았다.

엄마는 이렇게 매일, 벌과 모기에 물리며 밀림 가까운 수풀을 헤치고 상추며 고추, 부추 등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보내주곤 하셨을 텐데, 그것도 제 때 먹지 못하고 물러서 버리기가 일쑤였으니 엄마의 정성에 배은한 벌을 이렇게 받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주말에 몇 번 남원 집에 갔어도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눈을 부릅뜨고 남원 생각만 하는 엄마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눈만 마주치면 “남원 집에 가서, 이런저런 것들을 하고 오라”는 주문 때문에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 것이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왔다.

10월 말에는 엄마가 “감을 따야 한다”고 노래를 불러서 칠순의 큰삼촌을 모시고 둘째 아들과 남원 집을 찾았다. 삼촌은 일의 순서를 알아서 척척 진행을 하셨다. 잘 생긴 대봉 몇 개를 따로 보관하면서 “엄마가 홍시를 좋아하시니 잘 익혀서 챙겨드려라”라고 당부하셨을 때는 뭉클했다.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도는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찡하는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나훈아 노래 <홍시> 가사 일부)

중형차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감을 따서 삼촌네 이모네에 배달하고, 시댁과 선배 집에도 갖다 드리고 나니, 주말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고 몸은 일주일 내내 노곤했다.

그렇게 두어 차례 더 남원 집을 다녀오고는 더 이상 ‘효도’가 힘들어서 효녀가 되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엄마는 집요하게 본인이 집에 다녀오겠다고 운전해줄 것을 주문했는데, 엄마의 고집을 꺾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남았다. 이제 나는 엄마에게 ‘잠시 집에 다니러 가는 것도 외면하는 나쁜 딸’이 됐다.

내 마음은 이미 남원 집에서 멀어지고 있었는데 11월과 12월에는 주말마다 행사가 있어서 좋은 핑곗거리가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엄마의 뜨락 한 자락이 간혹 눈앞에 펼쳐지다 사라지곤 하면서 ‘아이고, 화분의 화초는 다 말라죽었을랑가?’ 싶다가, 추위가 다가오면서 ‘화초들이 이제 얼어 죽었을랑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보일러가 돌아가야 터지지 않을 텐데, 냉장고 음식도 다시 정리를 해야 할 텐데, 남원 김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세금도 챙겨서 내야 할 텐데…. 근심거리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한다. 관심 없는 내가 이럴진대, 하루 종일 침대에 앉아 계셔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타들어가고 메말라갈지, 안타깝다. 

너그럽게 웃으시는 당신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배웠죠
철이 없는 나를 항상 지켜주시는 하늘처럼 커보인 당신
우연히 서랍속에 숨겨둔 당신의 일기를 봤어요
나이가 먹을수록 사는게 자꾸 힘에 겨워지신다고
술에 취한 아버지와 다투시던 날 잠드신 줄 알았었는데 
불이 꺼진 부엌에서 나는 봤어요 혼자 울고 계신 당신을 
알아요 내앞에선 뭐든지 할 수 있는 강한 분인 걸
느껴요 하지만 당신도 마음 약한 여자라는 걸
(왁스 노래 <엄마의 일기> 가사 일부)

엄마는 수술 후에 합병증의 우려도 없는 편이고, 그대로 재활 훈련을 하신다면 그나마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다고 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이라 회복이 빠르다고도 했다. 내가 보기엔 엄마가 남원에 두고 온 ‘아이’들과 하루빨리 만나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것 같다.

업무차 시골을 자주 다니는 친구는, 혼자 시골에서 살던 노인이 아프면 자식이 있는 도시로 가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요양원에 살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불도 지피고 고추도 널어 말리던 시골집은 그대로 폐가가 되어 방치되는데, 그때가 제일 마음 아프다고 했다. 

어머님 오늘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어요
백날을 하루같이 이못난 자식을 위해
손발이 금이 가고 잔주름이 굵어지신 어머님
몸만은 떠나 있어도 어머님을 잊으오리까
오래오래 사세요 편히 한번 모시리라
(남진 노래 <어머니> 가사 일부)

긴 겨울을 재활병원에서 보내시느라 엄마의 뜰은 깊은 동면에 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봄, 엄마가 건강하게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날, 엄마의 집은 주인의 훈김으로 따뜻해질 것이다.

엄마의 뜰도 긴 잠에서 깨어나 두 팔 벌려 환영하고, 두런두런 생명을 노래할 것이다. 그즈음 엄마가 상추씨를 뿌리자고 부르신다면 핑계 대지 않고 바람처럼 달려가야겠다. 간간히 엄마의 팔과 다리가 되어 엄마의 뜰에 사는 ‘그 아이들’과도 작은 교감을 나누고자 한다.

엄마의 모든 것에서 숨 쉬는 것과 엄마를 지키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들과 엄마의 삶, 그 일부가 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문득 가슴이 뛰면서 다가올 봄날이 기다려진다. 엄마의 뜰에 봄이 엎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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