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전달 혹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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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전달 혹은 전시
[비필독도서⑫]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오학준 SBS PD
  • 승인 2019.03.07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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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PD저널=오학준 SBS PD(그것이 알고 싶다>연출] 나는 위로와 공감을 이야기하는 에세이들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짐짓 아는 체 하는 말투나 뒤집어보면 별 것 없는 내용 때문이 아니다. 그런 말들을 하는 이들이 내려오지 않으려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고통을 겪은 ‘선배’(!)들은 대부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자리를 고수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난 너희들의 고통을 잘 알아, 그건 이것 또는 저것 때문이고, 이 부분을 다르게 생각하면 고통은 조금 줄어들 거야, 그러면 넌 내일 조금 더 나은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이하 생략.

직업상 맘에 안 드는 문장들도 맛 없는 음식을 먹듯 깨작대며 읽어나가야 할 때가 있다. 교양 PD로 사람들을 이끌지 말고 사람들을 이끄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라는 선배(!)들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불쾌한 말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들이 위로하려는 것이 지금 고통을 겪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런 고통을 이미 겪고 이겨낸 과거의 자기 자신인지 헷갈린다. 고통만큼 각자에게 절대적인 것도 없고, 그렇기에 모두에게 딱 들어맞는 정답은 없는데 내가 이겨낸 방식을 자랑하는 글들을 읽으면 고통이 늘기만 하지 별로 줄어드는 것 같진 않았다.

근 한 10년간, 천 번쯤 흔들려보기도 하고, 미키마우스나 라이언 같은 캐릭터들의 강요된 미소에 주눅들어서 그랬는지, 이 책의 제목이 단번에 끌렸다.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제목부터 이미 상당히 심란하지 않나.

당연히 고통은 나눌 수 있는 것이고, 나눠서 반으로 만들어 덜어내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이 교양 PD들로 하여금 이 고통스러운 제작 환경을 견디게 만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고통을 나눌 수 있냐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을 멀쩡한 정신으로 읽어나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숨이 턱턱 막히는 경험을 하며 읽은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는 고통의 ‘고고학’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을 언어로 해소하려 노력하는 다양한 시도들과 그 시도들이 끝내 실패하는 지점들을 지층을 헤치는 고고학자처럼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저자가 보기에 각자가 겪는 무의미한 고통을 사회적, 친교적, 내적 영역에서 동시에 설명하고 해소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 같은 것은 없고, 언제나 모든 언어화의 시도는 실패가 유령처럼 들러붙어 있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주문에 불과하다는 것도 덧붙이면서..

그 탐사의 결과물을 손에 쥔 저자는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고통의 ‘사회학’을 다룬다. 고통이 이제는 사회의 전면에서 다루어지는 동시에, 모두에게 익숙한 형태로 납작해진 채로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인지를, 저자는 그 사회문화적 맥락들을 짚어가며 설명한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영역에서 자기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위기감이, 모두에게 ‘먹히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과정이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과 함께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언어가 고통 앞에서 멈추는 지점들과 고통을 포장해내는 ‘말의 잔치’를 둘러본 후,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고통의 윤리학을 말한다. 언어는 결국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기보다, 여전히 고통을 언어화할 수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탐색하고 그 위치에서 말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저자는 당신이 고통의 당사자라면 일기와 자서전과 같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형태의 글쓰기를 해볼 것을, 당사자의 곁에 선 이들이라면 당사자를 동원하기보다 동행할 수 있는 언어를 확보하기를 요구하며 책을 끝맺는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은 ‘고통은 나눌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고통을 나누는 데 실패했던 무수한 언어의 실패들을 통해 고통은 어떤 식으로든 ‘나누어져야 한다’는 윤리적인 대답을 가까스로 내놓는다. 이는 고통을 겪는 당사자의 곁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그들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대답하며 실패와 진전을 반복해 온 경험이 있는 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대답일 것이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노력해온 선배들은 교양 프로그램을 일종의 동행의 언어로 이해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조금 더 느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종종 그들 덕에 많은 사람들이 교양 프로그램에, 혹은 교양 PD에게 약간의 기대를 걸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당사자들의 고통을 평면화하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 역시 영상매체와 교양 프로그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면 운다, 이렇게 하면 좀 더 자극적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조금 더 본다는 말들은 소화하기 어려운 고통의 실존적인 측면들을 무시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 의미가 있다는 말과 더 많은 사람들이 볼만한 사례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 사이에 있는 거대한 균열을 눈 질끈 감고 횡단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헛소리하는 ‘멘토’들이 어째서 ‘멘토’가 되었는지 생각하면 그렇게 건널 수 있는 일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성과들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조금씩 뭉툭해져 온 생각들을 한 번쯤은 날카롭게 다듬을 수 있는 시간은 올까. 우리가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고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함께 고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이유들에 적합하게 일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순간 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나서 망연자실한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물론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것은, 책을 읽는 내가 어떻게든 변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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