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난 일터, 노동자의 자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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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일터, 노동자의 자리는
[비필독도서 ⑬] '균열일터, 당신을 위한 회사는 없다'
  • 오학준 SBS PD
  • 승인 2019.04.29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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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PD저널=오학준 SBS PD] "선배, 요새 더 힘들어요." 후배 하나가 술자리에서 말을 건넸다. "노동시간을 줄여보자고 시스템을 바꿨는데, 막상 바꾸고 나서도 저흰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술잔을 기울이던 후배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일하지만, 우리는 엄밀히 말해 같은 회사 소속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배의 업무가 부수적인 역할인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일이 태반이다.

주 52시간 노동이, 그저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인 일터에서 함께 뒹굴면서도, 막상 노동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고민할 때 그들이 시스템 속에서 함께 고려되는 경우는 드물다. ‘최대한’ 그들도 노동을 덜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립된 사업자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든 회사가, 혹은 관리자가 그들과 함께 만들어 내는 노동 산출물에 대한 감독과 통제를 거둔 적이 있었을까? 실질적으로 출근 시간을 통제하고, 비용을 조정하고, 작업 과정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내 후배가 스스로를 개인사업자라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연말정산을 할 때 정도이지 않았을까.

서로 비슷한 연차에 비슷한 일을 하고, 어쩌면 상품 생산(방송으로 치자면 제작)의 필수적인 업무를 분담하고 있음에도 누군가는 회사 소속의 노동자이고 누군가는 회사와 1대 1로 계약을 맺은 사업자 혹은 파견업체의 노동자인 것이 지금 내 일터의 모습이다. 이곳만큼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균열이 깊은 곳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 균열은 과연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 데이비드 와일이 쓴 <균열일터, 당신을 위한 회사는 없다>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찾다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노동정책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경제학자 데이비드 와일의 <균열일터, 당신을 위한 회사는 없다>(이하 <균열일터>)다.

데이비드 와일은 이 책을 통해 언제부터, 왜 이러한 형태의 일터 쪼개기가 나타났는지를 분석하고 그로 인한 피해는 어느 계층에 집중되는지, 개선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를 방대한 사례들을 통해 정리한다.

저자에 따르면 균열일터란 새로운 비즈니스 방식이다. 1970년대까지 경제성장은 대체로 이런 형태의 모델로 설명할 수 있었다. 기업은 생산비용을 감소시키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야 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했다. 늘어난 노동자들은 노조에 힘입어 상승된 임금을 얻었고, 이를 소비로 전환시켰다. 국가경제는 생산과 소비의 상호 증대를 통해 규모를 키워갔고, 복지는 이렇게 커진 국가경제로부터 자원을 얻었다.

1980년대,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경제 모델이 조금씩 보편화된다. 거대한 규모의 금융자본은 기업으로 하여금 투자자들에게 더 많은 이윤을 분배하길 요구했다. 이를 위해 기업은 비용을 줄여야 했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방법을 고안한다. 하나는 발달한 기술을 이용해 기업 외부에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제할 때 들이는 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조라는 단체를 우회해 인건비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확보된 이윤은 노동자들이 아닌 투자자들과 경영자들에게 주로 분배된다. 노동자들은 점차 불안정한 신분으로 밀려난다. 더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같은 일을 해야 하거나, 그마저도 직원이 아닌 ‘개인사업자’의 형태로 원래의 회사와 계약을 맺는다. 기업은 연금, 보험, 상여 등의 지출을 줄일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그들과 ‘고용’관계가 아니기에 고용주로서의 책임도 면제된다. 이를 저자는 ‘일거양득’의 상황이라 지칭한다.

기업이 이익을 보는 동안, 노동자들은 어떤 손해를 보고 있을까? 노동자들은 이제 노동의 기준과 조건을 정하는 과정에 집단적, 직접적으로 참여할 권한들을 잃어가고 있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든든한 버팀목이지만, 개별 회사의 노동조합이 포괄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수는 늘어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나 알바노조와 같이, 이러한 균열을 메우려는 시도들도 있지만, 법과 관행은 여전히 새로운 형태의 고용 관계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한다. 그 사이 저임금, 고강도 노동, 그리고 사고는 이어진다. 김용균씨의 사례처럼.

언론이라고 이 균열로부터 자유로울까? 방송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그들의 소속 역시 다양하다. 그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지닌 경험이 없다면 방송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는 나의 일터는 황폐하다. 전환의 시대, 새로운 미래를 위해 달려가야 할 시간에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사람들은 사라져있다. 숙련된 이들은 일터를 떠났고, 새로운 인재를 위한 교육은 언제나 더디다. 이로 인한 피해는 제작 일선의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나는 누구를 믿고, 무엇을 위해 방송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우리와 함께 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노동자에게 노조가 있는 것처럼, 회사 바깥의 이들을 위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KTX 승무원, 재능교육 학습지교사, 그리고 우정사업본부의 재택위탁집배원의 경우처럼 법은 조금씩 균열일터에 고용주들의 책임을 묻고 있다.

새로운 고용 형태들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노동법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 만큼이나, 현장에서 필요한 건 개별 노동자로서 제작자들의 고민이다. 책 마지막에 노동자들에게 목소리를 내라는 요구하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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