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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먼저 솔직한 고백부터해야겠다. 그 때까지만해도 언론에 비쳐지는 정치뉴스나 정치권 얘기는 관심밖이었다. 차라리 내겐 초기 무성영화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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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으로 들어가는 정치인들, 한식집에서의 계파 모임, 아침 등산, 재래식 시장상인들과의 악수, 서로 치고 받는 몸싸움 등 상투적인 장면 말고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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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뉴스에서 항시 보이는 존재들이었지만 들리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사실 가슴을 열고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도 없었지만 수십년간 들어온 정치의 수사학은 ‘거짓말 용어사전’이었다. 듣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한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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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치는 찰리 채플린처럼(그를 모독하는 것은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이나 표정만을 보여주는 소리 없는 코미디, 슬랩스틱(slapstick) 코미디였다. 하지만 정치의 유성영화시대를 연 위대한 한마디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강금실 장관의 “코미디야, 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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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ytn의 <돌발영상>을 즐겨보게 됐다. 우선 재미가 있었다.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면들, 들을 수 없었던 소리들이 안방의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늘 고결하고 합리적일 것만 같았던 정치권의 권위가 무너지고 이전투구의 양상, 그 속에는 삼척동자가 봐도 이상한 논리와 권위의식, 비합리성, 천박함이 존재함을 고스란히 비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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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을 다소 희화화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 프로그램의 최고의 미덕은 정치를 탈신비화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자. 기존의 뉴스프로그램들, 신문 잡지 등에서 정치얘기는 뉴스 가치 측면에서 최상의 단계에 위치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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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부분 국민의 마음속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들어온 “정치, 경제, 사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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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라는 무의식적인 위계질서가 “국어, 수학, 사회, 자연” 식으로 내재한다. 또한 정교하게 가공되고 편집된 관련 기사들은 ‘정치’의 신비화를 조장하고 정치는 대단히 능력있고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의 활동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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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식의 이면에는 정치권의 비리와 부정도 그 구조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어설픈 관용’ 또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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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지평에서 보자면, 이것은 수십 년간 공고하게 쌓여온 상식 이하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 담쌓기의 주범중 하나는 다름 아닌, 우리 언론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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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야, 코미디”라는 언설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커진다. “임금님은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고 소리친 <벌거벗은 임금님>의 그 소년이 누구보다도 용감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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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냥 보이는 현상을 얘기했을 뿐인 것이다. 우연찮게 방송을 타게 된 강장관의 혼잣말 “코미디야, 코미디”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여겼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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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특히 방송은 어느 정도의 신비주의를 내포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가 온다고 믿는 전 세계 아이들의 꿈을 소중하게 여긴다. “산타클로스는 없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야심차게 만들 pd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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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인형극에서 인형들을 조작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비추지 않는 것이나 화장기 없는 스타들의 부스스한 모습을 내보내지 않는 것이나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 편의 드라마에서 느끼는 시청자들의 공동 환상(common illusion)을 만들기 위해 pd들은 얼마나 노력을 하는가. 보는 그 순간만이라도 시청자들을 푹 젖어들게 하려고 얼마나 애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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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치는 공동 환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한국 방송에 있어서는 정치라는 단어에 침투돼 있는 이데올로기적 선입견, 신비화된 통념을 파괴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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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의 본래적 가치, 순기능적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폭력에는 ‘절충의 폭력’, ‘감춤의 폭력’도 존재하는 것이다. 카메라와 편집기를 만지는 우리들이 권력에 순응하고 편승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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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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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참여기획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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