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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화, 그리고 획일성
  • 최상일
  • 승인 1996.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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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 단칸방에서 누나와 자취를 하고 있을 때 이야기다. 그 때까지만 해도 중학교 입시가 있었고, 말하자면 나는 서울로 유학을 온 셈이었다. 시골에 비하면 서울 생활이란 게 정말 삭막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주변에 내 또래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놀 수 있었다. 한번은 이웃집 친구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명절 뒤끝이었는지 방안에서 윷놀이가 벌어졌다. 대여섯 명이 돌아가며 윷가락을 던지는데, 아이들인지라 순서가 가끔 헷깔렸다. 내 차례인데 다른 친구 하나가 윷가락을 집어가려 하자 나는 내 차례라는 뜻으로 "나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니들이 와! 하고 웃는 게 아닌가? 얘들이 왜 웃는가 두리번거리는데, 한 친구가 "나여 나여"하면서 내 말 흉내를 내며 웃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제서야 내가 표준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들이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책에서 배운 표준말을 써야하는 서울이라는 것, 내가 살던 고향은 사투리를 쓰는 시골이였다는 것도...그 뒤로 나는 내가 쓰던말의 어떤부분이 표준말과 다른가를 생각해보고 말을 하느라 말수가 적어지고 가능하면 말을 안하게끔 되었다.

우리는 과연 표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표준규격이 도처에 만들어지고 특히 산업분야에서는 이른바 "업계표준"에 따르지 않으면 물건을 만들거나 기술을 개발해도 곧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캄퓨터라든가 신종 미디어 같은 분야에서는 업체마다 자기들이 개발한 시술을 표준으로 만들려고 그야말로 피나는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본다. 효율성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산업부문에서 표준화 추세는 어쩔 수 없거나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우리 생활의 모든 분야가 반드시 표준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표준화라는 것은 산업생산의 측면에서는 획일화를 낳는것이 아닌까? 특히, 문화영역에서의 표중화는 획일화로 통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표준말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 이라는 표준말의 기준부터 문제가 있다. 단어 하나를 예를 들어 보자. 논이나 밭에서 잡풀을 뽑아내는 일을 표준말로는 "김을 매다"라고 한다. 그런데 시골 어른들과 얘기할 때에는 "김맨다"는 표현보다는 "지심맨다"라든가 "짐맨다"는 표현을 훨씬 더 많이 쓴다. 오히려 표준말인 "김맨다"는 표현은 거의 듣기가 어렵다. 이 경우 서울의 교양있는 사람들이 과연 논이나 밭에서 김을 맬 일이 얼마나 있었냐는 것이며, 이렇게 서울에서 쓰지 않는 말까지도 서울을 기준으로 해 표준말을 만드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표준말만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문제이다. 사투리가 심한 제주도를 예를 들면, 표준말만을 배워온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미 토박이 할머니들끼리의 대화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정도라고 한다. 표준화된 언어교육 때문에 문화의 단절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표준말을 배운다하더라도 자기 지방의 말을 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환경분야에서 이야기하는 "생물종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빈다면, "언어다양성", 또는 범위를 넓혀서 "문화다양성"도 마땅히 보존돼야 한다.

문화의 획일화현상은 도처에서 쉽게 눈에 띈다. 문화의 획일화현상이 반드시 표준화의 영향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표준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습관적으로 표준에 의존하다 보면 자신의 개성을 찾기보다는 남이 하는대로 휩쓸리는 분위기가 팽배할 수 있다. 유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왜 요즘 남자들의 머리는 나이가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 한결같이 짧은 것일까? 왜 그랜져의 색깔은 검은색이며 tv에 나오는 젊은 가수들의 노래는 한결같이 콩닥거리는 반주에 비슷한 모습의 춤만 추는 것일까? 머리칼의 길이 따위야 유행이려니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자동차의 색깔이나 대중가요의 유행에는 분명 산업적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른바 "패션"이란 말로 표현되는 유행이란 것도 알고보면 섹켸 의류업계의 장난이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유행이라는 것은 어차피 흘러가는 것이므로 그리 문제될 것이 없을 수 있다.

문화의 획일화현상보다 무서운 것은 사고의 획일성이다. 사고의 획일성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변하지 않음으로 해서 더욱 고질적이다. 재미없지만 또 다시 우리의 언론현실을 살펴보자. 여러분은 하루에 신문을 몇개나 보시는가? 일부러 미세한 논조의 차이를 감지하고자 하는 필요에서가 아니면 하루에 신문 두개만 보면 충분하다. 나머지도 거의 같으므로 더 이상의 신문보기는 시간낭비다. 특히 남북문제라든가 중요한 외교문제 같은 사안에서는 기사의 획일화현상이 더 뚜렷해진다. 기자들이 스스로 판단해 기사를 작성할 능력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닐진대, 이는 분명 오랫동안 언론계에 누적된 표준화된 취재와 편집, 획일적 사고의 소산이다. 방송뉴스도 아찬가지다. 뉴스아이템의 선정은 물론, 배열까지도 마치 짜고 하는 것처럼 똑같을 때가 많다. 뉴스프로그램만 그러한가? 드라마의 주제, 오락프로그램의 포맷, 라디오프로그램의 초대손님...독창성을 생명으로 해야 할 pd들의 프로그램도 표준화 또는 획일화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른바 신세대론도 하나의 유행이었는지 젊은 세대들로부터 시작되는 사회변역의 실마리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한때 신세대의 상징이라던 "나만의 개성" 전략도 모두들 개성을 찾아 제멋대로 행동하다 보니 자기들끼리 섞여버리는 느낌이다. 신세대론에 허점이 있다면 바로 이렇게 뒷심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세대론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표준화가 아니라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세대론은 의미가 있다. 다양성이야말로 인간세상 본연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 본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꼭 그럴 필요가 있는 부분이 아니라면 의식적으로라도 표준화라는 대세에 비협조적일 필요가 있다.

나를 돌이켜 보면, 내가 사투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허물없는 자리에서나마 조금씩 웃고 떠들기 시작한 것은 학교를 십수년, 표준화된 학교교육을 마치고나서 그 교육기간만큼이나 긴 원상복구 기간이 지나갔을 때부터로 생각된다. 말이란 사투리이든 표준말이든 어렸을 적에 배운대로 해도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터 말이다.

최상일 (pd 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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