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맨 트럼프의 블록버스터급 연출력 
상태바
쇼맨 트럼프의 블록버스터급 연출력 
트위터 ‘티저 예고’부터 '김정은 판문점 만남' 하이라이트까지...전 세계 시청자 '쥐락펴락'   
  • 허항 MBC PD
  • 승인 2019.07.03 11:0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0일 판문점 남측지역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동했다고 1일 보도했다. ⓒ뉴시스(출처=노동신문)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0일 판문점 남측지역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동했다고 1일 보도했다. ⓒ뉴시스(출처=노동신문)

[PD저널=허항 MBC PD] 지난 일요일, 하루 종일 뉴스특보를 보고 난 후 머리가 멍해졌다. 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이라는 역대급 사건을 생생히 지켜본 후의 여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를 더 멍하게 한 것은 바로 트럼프의 ‘연출력’이었다. 그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대중의 심리를 아주 잘 아는, 훌륭한 쇼맨이었다.   

“만약 이 트윗을 보고 김정은 위원장이 나를 만나준다면 반갑게 인사하겠다.” 트럼프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남긴 이 모호한 트윗 하나에 온 세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온 언론에서 이 트윗의 의미를 두고 분석과 전망을 반복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일종의 티저 예고(?)였다. 예고편부터 범상치 않은 블록버스터급 쇼는 갈수록 범상치 않게 흘러갔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후에도 ‘김정은을 만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로 시청자들을 애태웠다. 때마침 일요일이었고, 사람들은 ‘진짜 김정은을 만나려나’하는 마음으로 모두 TV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천만 관객의 눈을 붙잡아둔 셈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이 극적으로 확정된 직후 이루어진 한미 양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일종의 ‘제작발표회’였다. 사실은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기 위해 참모진이 많은 준비를 해왔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트럼프는 ‘뭐 운 좋게도 그렇게 됐네요’라는 태도였다. 많은 PD들이 제작발표회 때 시청을 구걸하지 않고 쿨하게 보이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곧이어 화려한 호위부대에 둘러싸여 광화문 사거리를 가로지르는 장면과 용산기지에서 판문점을 향해 이륙해 오르는 헬기의 모습은 예능 프로그램의 스케일을 넘은 블록버스터급 그림이었다. 시청자들은 마냥 달리는 차와 마냥 날아가는 헬기를 넋 놓고 지켜보았다. (아마 트럼프는 이 장면도 사전에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는 장면은 ‘트럼프 쇼’의 하이라이트였다. 포토라인이 정리되지 않아 불안정한 카메라 앵글은, 리얼리티의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어딘가로 움직이면, 카메라들이 그들의 투샷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헤매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자유의 집 회담 중에는 무슨 잠입취재를 하듯 문틈으로 찍는 앵글과 보좌진에게 제지당해 천장으로 틸트업되는 앵글이 고스란히 보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리되지 않은 화면들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극적인 역사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생생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카메라 없이 50분여의 단독회담이 끝난 후, 트럼프는 ‘회담 결과는 다음 편에 공개!’라는 표정을 지으며 오산공군기지로 떠났다. 웅장한 BGM과 함께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러 연단에 오르는 트럼프의 모습은, 역대급 블록버스터를 막 크랭크업한 감독의 표정이었다. 미국다운 격렬한 환호와 리액션이 더해져 블록버스터 대단원의 느낌이 오롯이 연출되었다. 

물론 북미 정상의 만남 자체는 역사적인 사건이고, ‘쇼’라는 용어에는 이를 폄하하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중대한 사건을 쇼적인 요소를 동원해 전 세계인에게 가장 극적으로 전달한 트럼프의 본능적인 감각에 탄복을 금할 수 없다. 과거 사업가 시절 TV 리얼리티쇼의 주인공이었기에 가질 수 있는 감각일까. 아니면 MBC 김현경 MBC 북한전문기자의 분석처럼, 황무지도 황금땅으로 선전하는 것이 본업이었던 부동산 사업가의 본능적인 직감인 것일까. 

사실 판문점 회동을 만들어낸 트럼프의 저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트럼프 본인도 무척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에 알게 된 그의 연출 능력에 예능PD로서 상당히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영화감독도 아니고, 작가도 아닌 미국의 대통령에게 직업적인 자극을 받다니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기탁 2019-07-05 12:21:30
최고의 기사입니다 乃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