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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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멀리즘도 괜찮아
인도 출신 작가 '라킵쇼'의 복잡하고 화려한 작품들... 미니멀 트랜드 속 돋보이는 '맥시멀리즘'의 가치
  • 이은미 KBS PD
  • 승인 2019.07.12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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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9일까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APMA, CHAPTER ONE’에 전시됐던 라킵쇼의 작품 'Cheetah and Stag with Two Indians‘
지난 5월 19일까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APMA, CHAPTER ONE’에 전시됐던 라킵쇼의 작품 'Cheetah and Stag with Two Indians‘

[PD저널=이은미 KBS PD] 지난봄 용산의 한 미술관에서 처음 본 ‘라킵 쇼’의 작품은 충격이었다.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와 미니멀리즘 라이프스타일이 대세이고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미니멈하게 정리하는 추세인데 온갖 장식을 다 모은 듯한 맥시멀리즘 그림이라니. 요즘 미술시장은 단순화된 추상화 중심의 현대 미술이 트렌드이기 때문에, 간결한 작품들 사이에서 홀로 맥시멀리즘을 외치며 캔버스를 꽉 채운 ‘라킵 쇼’의 작품은 단연 눈에 띄었다. 

 가로, 세로 1m가 넘는 캔버스에 여백의 미라든지 생략의 묘는 없었다. 금으로 그린 윤곽선, 에나멜 물감의 쨍한 색감, 촘촘히 박혀있는 크리스털과 비즈로 장식된 그림은 누가 봐도 노동집약적인 작품이다. 화려하고 정교한 표현을 보고 있으니 태국의 이국적인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작가 ‘라킵 쇼’는 인도 태생의 영국 작가다. 예측은 살짝 빗나갔지만 아시아 정서를 읽어냈다는 것은 아시안의 파동 같은 뭔가가 그의 그림을 첫 대면한 관람객에게 전해진 셈이다. 그 이후로 또 한 차례 프라이빗하게 소장되던 그의 그림을 볼 기회가 있었다. 멀리서도 그의 그림을 알아보고 가까이 가서 볼 만큼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이 드러났다. 

재미있는 것은 ‘라킵 쇼’의 그림이 강렬하기도 하지만 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첫 눈에는 동양적인 느낌이 들지만 여러 번 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연상되는 배경과 건축물이 눈이 들어온다. 더 자세히 보면 저 멀리 일본의 풍경화 같은 스타일도 살짝살짝 보인다.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림책의 삽화 같기도 한데, 동물들의 표정이 기괴해서 귀엽거나 동화 같은 느낌은 아니다. 

그런데 ‘라쇼 킵’ 작품은 집에 걸어 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화려함과 강렬함 뒤에 느껴지는 찝찝함이 있다. 그림 속 주인공격인 동물들이 의인화되어 있는데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고, 건물을 부수기 때문이다. 럭셔리한 화풍 안에 그려진 폭력성이라니, 반전이 있는 그림이다. 미니멀리즘이 유행인 시대에 거꾸로 흐름을 거슬러 맥시멀리즘을 추구하고, 가성비를 추구하는 시대에 노동이 많이 들어가는 그림들을 만들다니 반전이 있는 인물이다.  

 사실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국내에도 여럿 있다. 축구선수 박지성의 장모로 더 알려진 오명희 작가가 자개를 붙여서 만든 작품 시리즈와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소품으로 등장했던 김종숙 작가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산수화가 대표적이다. 그런데도 ‘라킵 쇼’의 작품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 것은 그 안에 담긴 반전과 극적 긴장감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맥시멀리즘이니 미니멀리즘이니 하는 것은 그냥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구성 요소들을 덜어내어 엑기스만 남기는 미니멀리즘도 좋지만, 본질에 부차적인 것을 계속 붙이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될 수도 있고, 그것이 맥시멀리즘의 장점 아닐까. 

 요즘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장치를 넣느니 마느니, 설정이 있어야 하니 마니, 포맷을 만드니 마니하며 설왕설래 했던 것이 떠오른다. 불안하니까 자꾸 보완할 요소를 넣게 되고, 넣다보면 복잡하고 예산이 넘치니까 다시 덜게 된다. 하긴 그 안에 반전과 극적인 요소만 있다면 프로그램이 미니멈하든 맥시멈하든 무슨 상관일까. 문제는 스토리나 메시지를 긴장감 있게 1분 1초를 연출하고 유지해서 시청자를 붙잡는 게 어려운 것이지.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자꾸 프로그램에 데코레이션을 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의 스타일을 자책하다가 ‘라킵 쇼’의 그림에서 위안을 얻어 본다. ‘뭐 어때? 자꾸 넣고 쌓고 하다보면, 그의 그림처럼 보면 볼수록 볼거리가 많은 뭔가가 만들어지겠지’ 며칠 전 ‘심플하면서 깊게’ 드라마 대본을 써야한다고 비슷한 고민을 토로하던 옛 동료 작가에게 ‘복잡해도 깊이가 있을 수 있다’고 응원의 문자를 보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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