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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이 내게로 온날 44]

'백조의 호수' 공연 개막 전의 무대. ⓒ김사은
'백조의 호수' 공연 개막 전의 무대. ⓒ김사은

[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2014년 5월은 빨간색 글자로 반짝거렸다. 어린이날과 부처님 오신 날 연휴가 일요일과 맞물려 직장인들의 가슴을 뛰게 했고 노동절 전후로 연차를 쓰면 며칠간의 황금 같은 휴가 조합이 완성됐다. 언론계 정년퇴임 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계 입문을 권유받던 K선배는 선거철을 앞두고 적당한 도피처가 필요했다. 그렇게 2014년 4월 말, K선배와 함께 북유럽 기행을 떠날 수 있었다. 

모든 여행은 즐겁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주요 관광지를 돌아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을 때, 또 다른 감흥이 몰려왔다. 에르미타쥐 국립박물관은 외관의 정갈함은 물론 소장품의 양과 질 면에서 다른 어느 박물관보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 도시에 가득한 예술적 정기를 향유하지 못함에 아쉬워하며 ‘언젠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도 보고 박물관도 다니며 며칠 다녀가면 좋겠다’고, K선배와 막연한 바람을 그리움처럼, 담녹색의 그 도시에 남겨두고 왔었다.

나는 지금 홀로 길을 가네
돌투성이 길은 안갯속에서 어렴풋이 빛나고
사막의 밤은 적막하여 
신의 소리마저 들릴듯한데
별들은 다른 별들에게 말을 걸고 있네
무엇이 나에게 그리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내가 후회할 만한 것이 있던가
나는 이미 삶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과거에 한점 후회도 없네
그저 자유와 평화를 찾아
다 잊고 잠들고 싶을 뿐
(레드몬도프 시 / 러시아 민요 “나홀로 길을 가네”) 

2017년 여름, 한여름 잘 보내자고 모인 자리에서 K선배는 러시아 여행을 구상하며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자유여행의 포부를 밝혔다.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 상당수가 동의했고 여행 일정을 2019년 6월경으로 하되 특히 공연을 많이 보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K선배가 개설한 통장으로 틈틈이 여행비도 모으고 건강관리도 해가면서 2년이 지났다. 

드디어 2019년 6월 2일, 10일 일정으로 20명의 일행이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이번 여행은 인솔자 김 사장님을 중심으로 각계에서 활동하다 퇴임하신 60~65세 선배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컴퓨터 관련 강의하는 장 선생과 중고생 남매가 참석해서 평균 연령을 확 낮추어 주었다.

여행 초반은 ‘황금고리’를 방문하는 일정이다. 황금고리는 모스크바 북동부에 위치한 13개 도시를 가리키는 말인데 13개의 도시를 이으면 고리 모양이 나온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세르기예프 포사트, 페레슬라블잘레스키, 수즈달, 블라디미르를 방문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모스크바에서 이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틀 숙박하는 동안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모스크바 단첸코 예술극장, 볼쇼이와 마린스키 공연을 신청해두었다. 개인의 컨디션이나 취향을 존중해서 공연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 나와 일행 4명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공연을 많이 보자고 해서 매일 밤늦게까지 공연을 관람하는 강행군을 했다.

스타니슬랍스키 단첸코 음악극장은 모스크바에서 볼쇼이극장 다음으로 인지도 있는 오페라‧발레극장이다. 러시아의 저명한 연출가이자 배우인 스타니슬랍스키가 이끌던 오페라 극단과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이끌던 모스크바 예술극장 극단이 합쳐져 1941년 설립됐다.

우리가 관람한 공연은 5개의 그룹이 각기 다른 주제로 공연한 무대였는데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퍼포먼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음향시설이 ‘빵빵’했고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과의 조화, 완성도 높은 연기와 연출에 몰입되었다. 러시아 현대무용의 일면을 감상했으니 단첸코에서의 경험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특히 무반주 연주곡에 안무를 입힌 작품과 샐러리맨과 주부의 일상을 코믹하면서도 밀도 있게 표현한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관객들은 쉬지 않고 박수를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그 박수소리에서 연기자들에 대한 격려와 애정이 느껴졌다. 무용수들과 관객들의 끈끈한 정이 전해왔다. 이 사람들은,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는구나.

방울달린 트로이카를 타고 떠나네
트로이카를 타고 떠나는 밤저 멀리 불빛이 반짝이네
아 지금 당신이 내곁에 있다면
우수로 가득찬 이 마음을 흩어놓을 수 있으련만
머나먼 길 밝은 달빛 속에서
저 멀리 울려퍼지는 노랫소리와
일곱줄의 기타소리는 
왜 나를 이렇게 밤마다 고통스럽게 하나
라라라 라라라라~
일곱줄의 기타소리는
어찌하여 밤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러시아 민요 <머나먼 길> 가사 일부 /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원곡) 

여행 6일 차, 모스크바 3일째 되는 날은 볼쇼이극장 관람 후 자정 무렵 기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한다고 해서 반가웠다. 2층 12번 룸에서 볼쇼이의 무대를 내려다보니 감개무량 그 자체였다. 80인조 오케스트라도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멋진 지휘자가 들어오고 그 익숙한 카르멘 서곡이 몇 미터 앞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질 때는 눈물이 찔끔 났다. 오케스트라 연주만 듣고 있어도 본전을 뽑은 느낌이었다.

볼쇼이 카르멘 공연을 보고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너무너무 피곤해서 세수하는 것도 잊고 잠들기는 처음이었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진동이 적당한 쿠션처럼 느껴져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 중간의 피로감을 차창 밖으로 날려버렸다. 철길 저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다.

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나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러시아 민요, 조수미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 가사)

5년 만에 다시 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묵묵히 흐르는 네바 강을 보니 마음이 편했다. 인솔자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셨다. 마린스키 신관에서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 갈라쇼를 예약했는데, 극단 사정상 취소가 되고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마린스키 백조의 호수를 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피로감을 무릅쓰고 발품 팔아 가며 공연을 네 개나 예약한 다섯 명에게는 행운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마린스키 신관은 깃털 하나가 커튼을 꽉 채운 채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 공연은 정면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관람객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엄마와 함께 온 발레복을 입은 소녀도 인상적이었다. 다들 행복해 보였다.

지휘자가 입장하고 80인조의 오케스트라가 백조의 호수를 연주한다.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는 230년 전통의 단체다. 18세기 표트르 대제 통치 아래 창단돼 러시아 황실 오페라 오케스트라로 사랑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발레 오케스트라다.

막이 오르고 지그프리드 왕자가 입장할 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쳤다. 이날 오데트, 오딜 역은 빅토리아 테레슈키나가 맡았고 지그프리드 왕자는 샌더 패리쉬가 공연했다. 

한국에도 몇 번 다녀갔던 빅토리아 테레슈키나는 진정 백조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가늘고 유연한 몸매는 백조를 연상시켰고 인간의 모습을 초월한 듯 백조의 선과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눈부신 백조로 날았다. 게다가 흑조까지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클래스와 기량, 연기력은 압도적이었다. 

독무와 2인무, 웅장한 군무, 어느 것 하나 아쉬움 없이 멋진 호흡을 자랑하며 모든 공연이 막을 내렸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노력을 했을지 가슴이 먹먹하고 콧등이 시큰했다. 평생을 공들인 그들의 예술혼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감사하고 감동했다.

숨 쉴 틈 없이 촘촘한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대 여섯 번의 커튼콜, 무대 밖 인사도 서너 번 이어졌다. 공연도 최고였지만 관객의 매너는 과히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는 세계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고, 관객들은 그 최고의 연기를 진심으로 경외하며 박수로 감사와 찬사를 보냈다. 무대 안팎에서 감동의 도가니였다. 마린스키 무대에 다시 깃털 하나가 커튼에 남아 펄럭인다. 내 가슴에도 문득 깃털 하나가 내려앉았다. 백조의 선물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지막 날이자 여행의 백미를 장식하는 9일 차, 일행은 마린스키로 다시 향한다. 전날 신관에서 관람한 다섯 명은 199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린스키 구관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인솔자의 권유를 받아들여 마린스키 구관에서 공연하는 <마제파> 오페라를 보기로 했다. 다른 분들은 마린스키 신관에서 <쥬얼>이라는 발레공연을 예약했다.

내게 <마제파>는 낯선 제목인데 이 지역에서는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나비넥타이에 성장을 한 중장년 노년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차이코프스키 <마제파>는 전 3막으로 푸쉬킨의 대서사시 Poltava(폴타바라고 하는 전투장소)를 기본으로 빅토르 브루레닌(Victor Brurenin)과 작곡자가 대본을 썼다고 한다. 주요배역은 마리아 (코츄베이의 딸), 마제파 (코자크의 늙은 족장), 코츄베이 (코사크의 원로), 안드레이 (마리아를 사랑하는 코자크의 청년) 등이다. 

알고 보니 마제파는 실존 인물이다. 코사크족의 족장 이름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코사크 군대를 이끌었던 사령관이다. 많은 작가들이 마제파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 미술 등 작품을 완성했다. 오페라 <마제파>는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인 마제파가 정치적 야망을 위해 로맨스를 이용한다는 대서사시적 스토리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코추베이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세 가지 보물을 어디에 감추어 두었느냐고 심문할 때 ‘나의 세 가지 보물은 강탈당한 나의 명예와 나의 딸, 그리고 아직 간직하고 있는 복수심이다’라고 대답한 장면이다. 솔직히 어렵고 지루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교롭게 딸 내외의 안내로 마린스키를 찾으신 네 명의 한국분과 함께 2층에서 관람했는데, 그 일행은 연로한 부모님이 힘들어하자 2막이 끝난 후 입장하지 않았다. 

의자도 불편하고 길고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러시아 유럽 관객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공연에 몰입하며 끊임없이 교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교육이자 훈련이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과이리라. 오후 7시에 시작된 공연은 인터미션을 포함 밤 11시에 막을 내렸다.

마리아가 죽어가는 안드레이를 껴안고 마지막 아리아를 마치고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일제히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해서 박수를 보냈다. 커튼콜만 일곱 번, 막이 드리워진 후에도 무대 주위에 모여 끊임없이 박수를 보내자 출연진은 박수에 화답하며 이후로 네 번이나 더 나와 인사했다. 열기는 백야현상만큼이나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내는 최고의 감사와 찬사, 소통과 교감의 소용돌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창출했다. 관객은 공연을 보고 감동하고 배우는 관객의 박수에 힘을 얻는다. 이러한 소통의 과정을 통해 예술이 번성하고 문화가 발전하며 인간의 감성이 인간답게 혹은 그 이상 영적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단첸코, 볼쇼이, 마린스키에서의 경험한 관객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예술 작품과 행위에 대해 매우 진지한 접근과 경외감, 공경심을 탑재하고 생산자로 하여금 더욱 고무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예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개의 인류 역사가 그러하지만, 수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며 발전해온 러시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찌 되었던 예술의 힘이 삶을 지탱하게 한 마지막 방어선이 아니었을까. 하여 이들이 예술을 접하는 방식은 더욱 경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정리되지 않은 감상이 더욱 뭉클하게 했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간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 이었기에 
수많은 세월 흐른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다준 
비처럼 홀연이 나타난 그런 사랑 나는 알았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별나라로 갈수 있다네 

이제는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 될거야 
저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리던 이인데 
그대와 나함께 하면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되는 우리는 영원한 저별로 돌아가리라 
(러시아 민요, 심수봉 번안 <백만송이 장미>가사 일부)

러시아어로 아름답다는 말은 “크라시바야”라고 한다. 어원을 따라가 보면 ‘불타오르는’, ‘붉은’ 따위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추운 지방 러시아에서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따뜻하게 해주는 대상이 아니겠느냐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러시아 가정에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고 한다. 냉혹한 추위와 거친 환경 속에서 생존율이 낮았던 러시아에서는 전통 인형 ‘마뜨로슈카’를 통해 다산과 모성, 풍요 등을 기원해왔는데, 집안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들고 성스러운 곳에 ‘마뜨로슈카’를 진열하고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그곳이 바로 ‘아름다운 공간’이다. 

새삼 이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세상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대상, 세상을 품어주는 따뜻함, 세상의 기운을 골라주는 다사로움, 거칠고 메마른 가슴을 부드러움으로 감싸주는 감성,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놀라운 생명력,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어린 생명을 살리듯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살린다.

러시아에서 만난 아름다움 ‘크라시바야’는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눈물이 난다는 것도 알았다. 아름다운 공연, 아름다운 관객, 아름다운 공간.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 뼘쯤, 마음이 더 열리고 조금 더 성장한 것 같아 행복하다. 아름다움을 좀 더 많은 사람과 나누면 좋겠다. 여행의 교훈을 생활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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