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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9 11:25
  • 수정 2019.08.12 18:49

"'위안부' 피해자 아닌 인권운동가 '김복동'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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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제작한 세 번째 영화 '김복동' 8일 개봉
송원근 PD "운명과도 같이 연출 맡아...절묘한 개봉 시기 하늘에서 할머니 도우시는 듯"

ⓒ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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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이미나 기자] 첫 인사를 나누고 책상에 내려놓는 송원근 <뉴스타파> PD의 휴대폰 케이스가 불쑥 눈에 띄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이순덕 씨를 상징하는 동백꽃 자수가 놓인, 손 때 묻은 케이스였다. 1인 미디어 활동가인 미디어몽구가 사용하던 것을 받았다고 했다.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로, 평화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 살았던 고 김복동 씨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도 미디어몽구로부터 송 PD에게로 넘어왔다.

2018년 10월, 미디어몽구는 송원근 PD에게 당시 결장암 투병 중이던 김복동 씨를 어떤 형태로든 영상으로 남겨두어야겠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정의기억연대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측이 그러모은 1테라바이트(TB) 분량의 자료가 송 PD에게 도착했다. 2011년부터 지근거리에서 김복동의 삶을 기록한 미디어몽구도 두 박스 분량의 테이프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한 달여가 흐른 2018년 12월. 모든 자료를 눈에 담은 송 PD는 여덟 장짜리 기획서를 썼다. 기획의도와 대강의 구성안만이 담긴 단출한 기획서였다. 그 기획서가 출발점이 되어 101분간의 기록, 영화 <김복동>이 완성됐다. 김복동 씨는 지난 1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 김복동은 여전히 꼿꼿한 모습으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그릇된 태도와 이어진 수출규제 등으로 한일관계도 최근 크게 냉각된 상황. 개봉 전날 만난 송 PD는 "영화에 김복동 할머니께서 이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하늘에서 아베를 이길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다"며 "그런데 지금도 김복동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적인 상황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송 PD와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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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시기가 절묘하다.

지난 1월 영화화를 결정했을 때부터 8월 8일 개봉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는 14일이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자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 집회가 1400회를 맞는 날이라 그 전주인 8일이 좋겠다고 봤다.

배급사 쪽에서는 '극성수기라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지만 상영관이 100개가 됐든 그보다 적든 일단 해보자고 했다. (상영관이 적어) 많은 분들이 보지 못하더라도, 김복동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가 한 편 개봉한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작업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아베 총리가 한국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내놓기 시작하더니 소녀상 문제까지 전면으로 떠올랐다. <김복동> 개봉을 통해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더 알아봐 주기를 기대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가 개봉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진짜 하늘에서 할머니가 도우시는 게 아닌가 싶다.

<자백> <공범자들>에 이어 세 번째로 <뉴스타파>가 제작한 영화가 됐다.

<자백>이나 <공범자들>이 손에 힘을 꽉 쥐고, 권력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보는 영화라면 <김복동>은 분노도 분노지만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볼 수 있는 영화다. <뉴스타파>를 아는 분들이라면 '<뉴스타파>가 이런 것도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실 거다. 그렇지만 <뉴스타파>를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이 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복동>은 오랫동안 김복동 씨와 함께 활동한 정의기억연대와 미디어몽구가 가지고 있었던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자료들을 받은 뒤,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인가.

일단 <뉴스타파> 데이터 팀을 통해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이슈들을 정리했다. 한편으로는 정의기록연대와 미디어몽구의 자료를 통해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 이력도 정리했다. 일종의 연대기이자 '타임라인'인데, 이걸 보니 중요한 사건들의 현장에 모두 김복동 할머니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2010년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시는데, 영화에서는 할머니의 그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자고 했다.

정의기억연대의 기록물과 미디어몽구의 기록물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것도 필요했다. 일본의 역사적인 맥락, 현재 상황 등을 취재하는 동시에 손영미 평화의우리집 소장‧김동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관장 등 할머니 주변에 계셨던 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고, 영상 속 순간순간마다 어떤 마음이셨을 지를 물었다. 이제는 할머니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없으니, 그분들을 통해 짐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들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자료실을 열어달라고 해서 들어갔던 날이었다. 그 안에서 음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찾았다. 1992년 3월에 윤미향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간사가 부산 다대포에 있던 김복동 할머니를 찾아가 나눈 대화와 같은 해 8월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말씀하셨을 때의 음성이더라. 댁에서 나눈 두 분의 대화 내용은 <김복동>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거다. 아시아연대회의에서의 사진이나 영상 자료도 어느 방송사에도 자료가 없다고 했는데, 그 자료실에서 찾았다.

ⓒ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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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에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털어놓은 음성을 검은 화면만을 바탕으로 그대로 들려주더라.

눈을 감고 음성을 처음으로 듣는데 말씀하시다 한숨을 쉬신다거나, 잠시 머뭇거리신다거나, 라이터를 켜시는 등 당시 김복동 할머니가 느꼈을 답답함이 느껴지더라. 그걸 극장에 온 분들이 그대로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연출하는 사람이 (그 장면을) 해석하고, 다른 영상을 덧붙여서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검은 화면에 음성만을 들려줌으로써 (관객이) 김복동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일종의 '개념 정립'을 한다면 그 이후의 활동상을 보면서도 의미를 느낄 거라고 판단했다.

<김복동>은 담담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들 각각 특징이 있었겠지만, <김복동>의 경우 기획 단계에서부터 할머니의 과거 이야기는 최대한 빼기로 했다. 그걸 재현할 건가, 삽화를 넣을 건가. 그런 구태의연한 방식은 지양하고 '오늘'을 살았던 김복동 할머니가 어떻게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평화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는지, 어떻게 '살아있는 증거'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명하고 다른 전쟁 성폭력 피해자들을 감싸 안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을 보여줄 수 없다면 <김복동> 자체가 갖는 차별점이 없을 것이란 이야기를 (제작진끼리) 나누기도 했다.

영화를 만들면서 그동안 갖고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각, 혹은 김복동 씨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면 '불쌍한 할머니들'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이 분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걸 깊이 느꼈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김복동 할머니가 그렇게 활동하실 수 있었던 건 '내 미래 세대에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영화에서도 계속 드러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래를 부르시거나 농담을 하시는 등 인간적인 면모도 영화 중간 중간 들어가지만, 그렇게 자신의 슬픔을 넘어 마음을 다잡고 활동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렇게 깊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제작진에게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영화화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결정됐는데, 전주영화제 출품 일정 때문에 4월 말까지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라 굉장히 노동집약적, 압축적으로 작업해야 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계속 김복동 할머니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일, 그게 굉장히 힘들었다. 쉽게 이 작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겠더라. 전주영화제가 끝나고 제작진 모두 마음이 힘들어 같이 한 주 정도 쉬었다가, 다시 모여 수정 작업을 시작해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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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다양한 협업과 여러 플랫폼을 활용하는 시도를 해왔다. 이 같은 작업 방식에 장점이 있나.

<뉴스타파>는 진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조직이다. 일반 방송사의 경우 편성 시간이 정해져 있고, 팀과 부서가 있지 않나. 하지만 <뉴스타파>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을까'부터 고민한다. 물론 힘든 작업이다. 갖춰진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이지 않으면 어렵다. 반면 ‘그릇’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자유롭게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큰 것 같다.

이제는 방송사도 옛날 방식 그대로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기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모두 퀄리티가 뛰어난 콘텐츠를 내놓는 건 아니다. 그들이 인기 있는 건, 시대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쓴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나도 그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틀 안에서 호흡한다는 마음을 빨리 버리지 않으면, 지금의 흐름에서 버텨내기 어렵다고 본다.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거나 여성혐오적인 시각으로 보는 일부 세력도 있다. <김복동>이라는 영화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잘못된 사고방식이 통용될 수 있도록 놔두는 사회 분위기가 한몫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뉴라이트 세력이 득세하던 시절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세대가 제대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영향도 있는 것 같다. '교육'은 무언가를 주입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알려주고 (학생) 스스로 느끼고 되새기며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김복동>을 통해 냉철하게 역사 속에서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왜 '위로금'이 아닌 '배상금'을 요구하라고 하는지, 왜 사죄를 요구하는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만 정확히 알아도 올바르지 않은 뉴스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의 사회가 한 그루의 나무라면 <김복동>은 줄기나 꽃이 아닌, 뿌리이자 토양 같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 땅이 뿌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뿌리가 땅 속 깊이 단단히 내려야 나무가 똑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가 본격적으로 관객을 만난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할머니가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청소년기를 지금 살고 있는, 많은 젊은 분들이 봐 줬으면 좋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며 애쓰셨던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마음 속에 김복동이라는 이름 석 자를 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김복동>으로 지었던 거다. 보다 임팩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할머니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김복동>을 고수했다. (웃음)

지금까진 이 영화가 나온 게 뉴스니까 여러매체에서 <김복동>을 소개해 줬다. 개봉을 했으니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관객이 봤는지, 영화를 보고 일어난 사회적 변화 등이 기사화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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