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로 포장한 차별과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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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19] ‘유머란 무엇인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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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 축구 대표팀이 우승했을 때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는 자신의 쇼에서 “아프리카가 월드컵에서 우승했군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 조상이 아프리카로부터 온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미 프랑스 대사는 공식적으로 이 농담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그들을 아프리카팀이라고 말하는 건 그들의 ‘프랑스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편지를 읽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아프리카 이민자’로 불리는데, 그들이 프랑스에게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면 오직 ‘프랑스인’으로만 불리지요.” 그는 도움이 될 때만 ‘우리’라고 부르는 프랑스 정부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그는 덧붙여, 피부색과 연관된 농담을 던지는 이유를 말한다. “트레버가 말하면 인종차별이 아니고, 우리(백인)이 말하면 인종차별이냐? 맞아요. 왜냐면 전 맥락이 중요하다 생각하니까요.”

맥락은 유머를 결정하는 ‘최종 심급’과도 같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이라고 해도 누가 말하는지, 누가 듣는지, 어느 상황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따라 유머가 되기도 하고 섬뜩한 말이 되기도 한다. ‘콩고 왕자’ 조나단이 ‘흑인’에 대한 유머를 하며 깔깔 웃다 정색하고선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거예요”라고 말하며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유머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좁고 긴 바닥을 드러낸다. 언제든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유머다.

맥락에 의존적인 유머의 성격은, 웃음을 손아귀에 쥐려는 이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웃음이 가진 해체적인 성격이 혹시나 자신들이 애써 쌓아놓은 사회 질서를 흐트러뜨릴까 걱정했기에, 웃음을 지우고자 웃음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물리적 행위이자 사회적 행위인 웃음을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유혹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 시도는 언제나 실패해왔는데, 웃음을 유발하는 원인이 워낙 다양한데다, 웃음 자체가 신체와 문화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권력이나 이론이 완전히 장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웃기지 않는 상황이 누군가에겐 배꼽 잡을 일이 된다는 건 너무나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고작 바닥에 배를 부여잡고 뒹구는 행위 때문에 강고한 지배 질서가 흔들릴까 싶지만, 권력자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웃음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웃음은 특별한 준비물 없이도 누구나 취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민주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웃음이 권력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피어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영국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쓴 '유머란 무엇인가'
영국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쓴 '유머란 무엇인가'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유머란 무엇인가>에서 이러한 욕망이 추동한 웃음에 대한 일반 이론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단지 우리는 이전의 사람들이 그려낸 지도들을 가지고 이 비밀스런 웃음의 윤곽을 대략이나마 그려볼 수 있을 뿐이라 말하면서.

저자가 보기에 사람들은 웃음의 원인에 대해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해 왔다. 어떤 이들은 웃음을 긴장된 상황이 기대와 다르게 끝날 때 정신적 에너지가 방출되며 터져 나오는 신체 행위라고 봤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느끼는 일종의 우월감이 변형된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군가는 웃음을 어긋남, 불일치, 낯설음과 같은 부조화로부터 나온다고 봤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설명은 각각 장단점이 있기에 하나의 설명만으로는 모든 웃음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부조화’와 ‘방출’ 개념을 조합해 웃음을 설명한다. 웃음이란 조화롭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감정의 긴장이 해소되며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조화롭지 못한 모든 상황이 다 웃긴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 별다른 어색함이 없는 상황도 맥락에 따라선 웃길 수도 있다. 게다가 말초적인 웃음에 부조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부조화의 개념을 마구 넓히다간 설명 같지 않은 설명이 되어버린다.

결국 엄밀히 말해 모든 웃음을 아우르는 완벽한 설명이란 없다. 확실한 것은 웃음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그들이 놓인 상황과 그들이 공유하는 맥락에 따라 터져 나올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뿐이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우월감을, 누군가는 긴장의 해소를, 누군가는 어긋나는 상황의 충돌 속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를 웃음으로 표현한다. 그러니 웃음은 하나의 앙상블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따라서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가, 유머로서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은 사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친밀한 관계에선 모욕도 때로는 웃음이 되지만, 공적인 관계에서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고 해서 웃음을 유발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모두 동등한 도덕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원칙을 훼손하는 차별이 옳지 못한 차별이 되듯이, 웃음 역시 비하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낭떠러지 위에 놓여 있다. 웃음은 언제나 위태로운 선을 넘나들며 사회의 경계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철 지난 차별과 혐오를 바탕으로 하는 ‘개그’를 여전히 시대착오적으로 재생산하는 매체다. 미디어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에 대항해 싸워온 이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사회 개혁의 노력들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매체는 스스로 얼마나 빠르게 시대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만 한다. 언젠가는 시대보다 반발 앞섰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시대에 뒤쳐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얼굴을 까맣게 칠하고 인종을 흉내 내는 유머를 실은 매체는 암묵적으로 이러한 유머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를 전파한다. 사회에 만연한 편견에 기대어 쉽게 즐길 수 있는 ‘유순한’ 유머가 권력을 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일이 있을까. ‘정상’이 아닌 사람들을 비웃을 수 있는 편견이야말로 권력자가 원하는 웃음 코드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유머들이 이제는 때를 놓쳤다고, 그 유머들은 놀려도 ‘안전할만한’ 약한 자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꼬치꼬치 따져 물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프로 불편러’들은 여전히 필요하다. 누군가는 ‘PC충’이 납시었다고 비꼴지도 모른다. 그냥 웃는데 무엇이 그리 불편하냐며 조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하, 조롱, 혐오가 유머라는 이름을 획득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유머가 조금 더 ‘불손’해질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은 필요하다.

물론 그런 ‘프로 불편러’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유머일지도 모른다.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말마따나 우리는 개혁을 위한 주먹을 쥘 때에도 손가락을 펼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전직 대법원장 앞에선 웃지 못하면서 철가방을 든 배달원을 향해선 웃음 짓는 기자들을 보고, 그들이 공유하는 코드를 비웃어줄 수 있는 지독한 블랙유머 같은 것 말이다. 솔직히 지금의 시대가 너무나 유머러스한데 나 빼고 그들만 웃는 건 많이 불공평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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