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사라진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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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20]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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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미국의 노동운동가 앤드류 스턴은 1996년부터 2010년까지 14년간 북미 서비스노동조합(SEIU)의 조합장이었다. 그가 조합장으로 일하는 동안 SEIU는 220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고, 미국 최대 노동조합연맹체인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동조합이 됐다. 유례가 없는 성장속도였다.

앤드류 스턴과 SEIU는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노조의 풀뿌리 조직을 동원해 무려 6천만 달러에 육박하는 선거자금을 모아 오바마를 지원했고, 대선 이후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환자보호‧부담적정보험법을 통과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동시에 대형 노동조합연맹체의 분열을 이끈 당사자이기도 했다. 2005년 그는 SEIU를 이끌고 AFL-CIO로부터 탈퇴한 후, 6개의 노동조합과 함께 새로운 노동조합연맹체인 ‘승리를 위한 변혁(Change to Win)’을 출범시켰다. 반세기만에 처음 벌어진 대형 노동조합연맹체의 분할 사건은 당사자들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을 남기기도 했다.

지지자로부터는 “대담하게 새로운 길을 계획한 용기 있고 전망 있는 지도자”라는 평을, 반대로 AFL-CIO의 전 동료들로부터는 “미국 노동운동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충동적이고 권력에 고픈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 그는 2010년 돌연 조합장직에서 물러났다. 노동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자평하면서. 무엇이 그의 행동을 이끌었을까. 그가 바라본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확인한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은 스턴이 조합장직을 사퇴한 지 6년 만에 내놓은 책이다. 그가 노동조합에서 일했던 경험과 경제학자‧CEO‧노동운동가‧엔지니어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미국 노동시장이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경제’로 변모하고 있음을 짚어낸다. 스턴은 이를 기존 기업 중심의 노조 운동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으며, 오히려 포괄적인 정책적 해법으로 기본소득과 같은 대안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앤디 스턴이 쓴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
앤디 스턴이 쓴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

그의 고민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와 동료들이 앞으로도 노동조합을 강하게 만드는 일에 계속 매달린다면, 25년 후 미국 노동자들의 삶은 더 나아질까?”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노동조합의 구성원인 기업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고, 반면 기업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파견노동자, 프리랜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황금기’ 시대의 기업은 노동자들이 단체 협상을 벌일 수 있는 무대인 동시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을 보호해주는 1차적인 안전망 역할을 제공했다. 노동조합은 그 무대 위에서 기업이 노동자들로부터 부당하게 더 많은 몫을 떼어가는 행위를 방지하고, 이윤에 대한 노동자들의 몫을 늘려 노동자들을 중산층의 궤도에 올려놓는 역할을 담당했다.

문제는 이 몫의 분배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성장이 둔화되고 이윤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없을 때, 노동자가 공유하는 몫을 다시 되찾아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노조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노동유연화를 담은 입법 조치들이 속속 등장했다. 기술의 영역에서는 단순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자동화가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을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변수’로 취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저자가 보기에 회사를 경영하는 자본가들에게 정규직 노동자들은 ‘총체적 비용’이 높다. 단순히 임금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회보험을 제공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드는 비용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한데 모여 ‘파업’이라도 한다면 회사는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발달된 자동화 기술은 그런 위험요소를 제거해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회사와 고용관계로 맺어지기보다 수많은 기업들의 연쇄 속에서 불안정한 지위로 추락한다. 정규직 일자리들은 파견직으로 대체되거나, 아예 일자리 자체가 여러 단순 업무로 분할되어 버린다. 스턴이 보기에 이 복잡한 노동의 분할과 재조립은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로 더욱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달대행, 이사대행 서비스와 같은 ‘플랫폼 자본주의’는 노동의 일반적 형태를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를 토대로 하는 기존의 노동운동은 대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저자는 회의적이다. 한때는 산별노조의 조합장으로서 대형 노동조합의 역할을 고민했지만, 지금은 기술발전으로 인한 실업은 필연적이며 이를 완전고용이나 노동조합의 역할 확대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가 내미는 대안은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을 우려로 몰아넣은 기술적 진보를 자아실현과 공공의 이익을 이끌어내는 힘으로 바꿈으로써 곤경에 빠진 21세기의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잠재적 해결책”이라는 것이 스턴의 생각이다. 기본소득을 실험한 다양한 지역의 사례들과 학자들의 제언을 참고하며 그는 노동이 사라진 시대에 새로운 안전망에 대한 사회계약으로서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빈곤을 극복하고, 자아실현을 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며, 여기에 소득이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말이다.

책의 논조는 온순하지만, 논쟁적이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격언에 반대하며, 우리는 앞으로 일할 수 없게 될 것이지만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전직 노동조합 조합장의 모습은 흥미롭다. 물론 노동의 신성함을 믿으면서도 기술의 발달이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를 내놓지 않을 가능성에 깊이 공감하는 저자의 태도는 어느 정도의 거리둠이 필요하다. 특히 레이 커즈와일을 인용하며 기술의 발달이 노동자들의 업무를 빠르게 대체해버린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지점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톨게이트 노동자의 목소리에 ‘어차피 없어질 직업인데’라고 말하던 청와대 관계자의 목소리가 얇게 겹쳐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접근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결론에 이르는 가이 스탠딩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와 미국 노동 시장의 변화 양상에 주목하는 데이비드 와일의 <균열일터>도 곁들여 읽으면 스턴이 투박하게 그려내는 글로벌 노동시장의 세밀한 부분들까지 확인할 수 있다. 세 권의 책 모두 기업은 책임을 회피하고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사이 노동자들의 안전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바람직한 미래의 상과 제언하는 대안들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미래의 모습을 그려가며 논쟁할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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