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덕후’ ‘여성시대’ PD에게 청취자 사연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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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출 맡은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20년 넘게 ‘여성시대’ 이끌어온 작가·DJ가 보여준 진심
수능 당일에도 라디오에 사연 보낸 추억 ‘방울방울’...사연 읽을 때마다 어깨 무거워      

지난 10월 23일 EBS 연습생 펭수가 출연한 MBN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보이는 라디오 방송 화면 갈무리.
지난 10월 23일 EBS 연습생 펭수가 출연한 MBC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보이는 라디오 방송 화면 갈무리.

[PD저널=하정민 MBC PD]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박금선 작가님. 다른 스태프와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 나중에 꼭 박금선 박물관 만들어요”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방송사 안팎에서 존경받는 분이다.

입사 초기 작가님의 원고를 몰래 모아 스크랩해둔 적도 있고 어떤 원고는 금과옥조 같아서 책상에 한참 붙여놓기도 했다. 그 분의 글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과 냉철한 시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다정하게 우리 마음을 다독여준다. 출판하신 에세이들도 구해 아껴 읽었을 만큼 그분의 팬이기도 해서, 이번에 이 프로그램에 발령을 받은 나는 ‘계 탄 덕후’, ‘성공한 덕후’인 셈이다.
 
게다가 믿기지 않는 성실함으로 25년 동안 <여성시대>를 이끌어 오신 분이다. 그런 박금선 작가님의 에피소드 중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분의 아이들이 어렸을 적, 새로 옮긴 어린이집이 낯설어 우는 아이를 겨우 달래 떼어놓고 바삐 출근하러 택시를 타셨단다. 작가님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는데 지켜보던 택시 기사님이 라디오 볼륨을 높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줌마, 아줌마보다 더 힘든 사람 많아요. <여성시대> 들어보세요.”

작가님은 그 때 울다 웃다, 얼마나 복잡한 심경이었을까. '일하는 엄마'로 고군분투하는데,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 다시 위로를 받다니.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분에게 자신의 프로그램을 추천받다니. 웃프지만,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다.
 
며칠 전, <여성시대>로 쏟아지는 절절한 편지들에 파묻혀있다 파김치가 돼서 퇴근하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방송사 라디오 PD로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사람이 되었을까? 요즘 라디오는 라디오 PD들이나 듣는다는 자조도 나오는 판에, 과연 다른 일을 하는 나는 일상 속에서 라디오를 듣고, 사연을 보내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진행자의 멘트에 귀 기울이고 있었을까?

박금선 작가님께 여쭤봤다. 만약 라디오 작가가 되지 않으셨더라면, 사연을 보내셨을 것 같은지. 망설임 없이 “아마 보냈을 걸요?” 하신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어린이 프로그램에 퀴즈 정답을 보내서 사인펜 세트를 받았던 일과 학창 시절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 3천원어치 상품권을 받아서 반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돌렸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제 일인 것 마냥 생생한 즐거운 표정으로. 

사인펜 세트를 상품으로 주던 시절보단 풍족했지만, 나도 그런 기억이 꽤 된다. 스스로 열혈 라디오 키드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돌아보니 사연을 보냈던 추억이 꽤 많다. 학교에 머리를 못 감고 나갔다 생긴 일을 각색해 보낸 사연이 장원으로 뽑혀서 상품으로 CD플레이어를 타기도 했다. 그 날 방송에서 ‘이 사연에 1등을 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게스트를 지금도 괜히 혼자 내 인생의 은인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 분은 무려 유느님, 유재석 님이다!) 그 후에도 문화상품권, 책가방 등 라디오 상품을 참 많이도 탔다.

심지어 수능을 보러 가는 날 아침에도 라디오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그 프로그램은 상품도 없었는데, 큰 시험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을 사연을 적으며 좀 진정시켰던 게 아닌가 싶다. 수능 앞에 쫄지(?) 않은 척, 호기를 부렸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런 나였으니까, 라디오 PD가 되지 않았더라도 아마 어딘가에는 사연을 보내고 있었을 거란 결론이다.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라디오 방송 참여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요즘엔 업자(?)의 마음으로 어떤 재치있는 문자가 올까 궁금해서 50원을 써가며 문자를 보내본다거나, 나름 웃겨보려고 보낸 이행시나 날씨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보낸 신청곡이 채택되지 않아 자존심 상해하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프로그램에 푹 빠져서 보낼 때가 더 많다.

'여성시대' 진행자인 양희은 서경석 DJ.
'여성시대' 진행자인 양희은 서경석 DJ.

<여성시대>는 입사하고 발령받은 나의 첫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을 처음 배운 첫사랑과도 같은 곳이라, 오자마자 바쁘게도 일했다. 주말에 태풍 소식이 있으면 준비된 방송을 날리고 스태프 모두 고생스레 생방송을 하고, 대통령의 추석 인사를 듣기도 하고, 유튜브 스타 ‘펭수’도 모셨다. 청취자가 배우 정해인 님의 팬이라고 해서 어렵사리 답장 음성편지를 받아 전달하고... 늘 그 자리에 굳어져있는 프로그램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이런저런 법석을 떨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거라고 생각해서다. 

다시 말하면 늘 든든히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두 진행자분과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사연들 때문이다. 흐뭇한 웃음을 자아내는 일상 속 에피소드와 삶의 크고 작은 깨달음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고,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 <여성시대>는 빛이 난다.

오죽하면, 진행자이신 양희은 선배님도 데뷔 30주년 기념앨범을 통째로 한 사연 속 주인공에게 헌정했었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오셨다. 발령받아 오자마자 제일 먼저 당부해주셨던 말씀도 작고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 청취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라는 이야기셨다. 그래서 편지를 읽고 고를 때마다 어깨가 무겁다. 어떻게 해야 한 사연 한 사연에 가장 효과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수 있을지를, 잘 구르지도 않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귀를 기울여주는 분이 있는 한 그렇게 할 거다. 그게 학창시절부터 라디오에 보낸 나의 사연, (좀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러브레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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