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머니’, 사회파 감독의 노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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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부군’ ‘남영동 1985’ 등 현대사 질곡 오롯이 그려낸 정지영 감독 
가시밭길 걷는 이유 묻는 질문에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어서 한다”

영화 '블랙머니' 스틸컷.
영화 '블랙머니' 스틸컷. 정지영 감독(왼쪽)과 배우 조진웅(가운데)의 모습.

[PD저널=김훈종 SBS PD] 그에 대한 날카로운 첫 기억은 UIP(할리우드 직배사) 직배 반대 운동과 오롯이 겹쳐진다. 1988년 추석시즌 UIP 첫 직배작,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위험한 정사>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뱀 자루가 발견됐다. ‘배암을 극장에 푼다’는 이 시대착오적이며 그로테스크한 사건은, 당시 영화인들의 절박함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방화’란 이름으로 괄시받던 우리 영화는 할리우드 작품과 체급이 달랐다. 헤비급과 맞서야 하는 라이트급의 비애랄까. 

그 이후 이어진 스크린쿼터 투쟁, 사전검열 철폐운동 등 영화인의 투쟁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때로는 삭발을 한 채 머리띠를 동여매고, 때로는 피켓을 들고 목 놓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맨 앞에 서있었다. 전두환의 3S정책으로 망가진 영화판에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등과 함께 등장한 그를 우리는 ‘코리안 뉴에이브’라고 부른다. 감독인지 투사인지 모를 그의 행보는 연출작에도 그대로 녹아나 있다.  

1990년 개봉한 <남부군>은 그의 대표작이자, 감독 정지영을 세상에 알린 포효였다. 1987년 6월 항쟁 덕에 국민들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았지만, 여전히 군부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시대였다. 북한군보다는 괴뢰군이란 말이 익숙했고, 철마다 그려대는 반공포스터에는 북한 주민을 눈이 시뻘건 늑대로 표현했으며, ‘삐라’를 주워가면 파출소에서 연필을 선물로 주던, 말하자면 ‘좌익용공 타도의 시대’였다.

<남부군>은 이른바 ‘종북 시나리오’였고, 이를 제작하면 ‘종북 제작사’가 되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누구도 영화를 제작하려 하지 않았다. 정 감독은 어쩔 수 없이 <남부군> 제작을 위해, 아예 제작사를 차려야만 했다. 그토록 험난한 과정을 겪은 덕에, 정지영 감독은 빨치산이란 존재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한국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강대국 사이에 끼여 치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슬픔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절절하게 표현해냈다. 

그는 스크린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 정의를 위해 한 발자국씩 묵묵히 움직였다. 월남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린 <하얀 전쟁>, 사법부 판사들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한 <부러진 화살>, 군부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맞서 싸운 민주투사들이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었는지 고발한 <남영동 1985> 등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의 작품 속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영화 '블랙머니' 스틸컷.
영화 '블랙머니' 스틸컷.

최근 연출을 맡고 있는 SBS <최화정의 파워타임>에 <블랙머니> 조진웅, 이하늬 배우와 함께 정지영 감독이 출연했다. ‘할리우드에 올리버 스톤이 있다면, 충무로에는 사회파 감독 정지영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우디 알렌 같은 감독도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는 건 맞지만, 그들은 인생을 관조하면서 삶의 정수를 뽑아내는 유형의 감독이지, 사회파 감독은 아니다.  

극장 속 뱀 자루, 삭발 시위, 빨치산, 석궁 테러, 천암함, 월남전, 남영동 대공분실 등 그에게 덧입혀진 이미지들을 머릿속에 생각하며 정지영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왜 계속 이렇게 힘든 작품을 하시는 건가요?” 뭔가 있어 보이는 거창하고 심오한 대답이 나올 거라 기대했지만, 의외로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저라도 해야지요.”

이거구나!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정의로운 곳으로 한 발자국 나가게 만드는 사람들은 남들이 가지 않는 가시밭길을 스스럼없이 가는 존재구나. <블랙머니>를 통해 그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경제 관료와 헤지펀드가 결합해 대한민국의 국부를 어떻게 추잡하게 들어먹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영화는 안 보면 손해에요.” 그의 말마따나 이 작품은 완성도를 떠나 꼭 봐야하는 작품이다. <블랙머니> 영화 엔딩 크레딧곡으로 치타와 에스진이 부른 <아리>란 곡이 흘러나온다. 국적 불명의 ‘파이팅’ 대신 쓸 수 있는 말이란다. 정지영 감독님! 아리 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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