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고장난 눈물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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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고장난 눈물 버튼 
TV 보다가 속절없이 터지는 눈물샘...매일 라디오를 통해 만나는 청취자들의 소중함 절감하는 세밑
  • 하정민 MBC PD
  • 승인 2019.12.20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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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종영한 KBS '동백꽃 필 무렵' 화면 갈무리.
지난달 21일 종영한 KBS '동백꽃 필 무렵' 화면 갈무리.

[PD저널=하정민 MBC PD] 연말연시의 멜랑꼴리한 기분에 휩쓸려서일까, 요즘 눈물 버튼이 자주 눌린다.
 
가장 최근의 오열은 U2 내한 공연에서였다. 곡 ‘울트라바이올렛’을 연주하는 중 거대한 스크린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들 얼굴이 등장하는데, 서기 424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의 자막과 함께 등장한 해녀들의 얼굴에 뭉클해졌다. 서지현 검사와 설리의 얼굴이 스크린에 떠오른 걸 발견한 순간부터는 울먹이다 문득 주변을 봤는데 여성 관객은 거의 다 눈물을 훔치고 있어서, 괜히 더 복받쳤다.

외국 밴드의 공연에서 예상하지 못한 너무나도 구체적인 메시지를 정통으로 맞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어떤 방식으로든 화면 속 저 친구에게 힘을 줄 수 있었더라면, 연대할 수 있었더라면.

눈물 바람의 시작은 얼마 전 종영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부터였다. 드라마가 종영한 이후에도 여러 번을 다시 봤지만, 아무리 봐도 무심히 지나가질 못하는 장면이 있다. 동백 엄마가 수술 중, 생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꾸는 꿈에서다. 꿈에서는 보육원에 아이를 버리고 돌아섰던 날이 반복된다. 동백 엄마는 꿈에서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과거와 달리 아이를 다시 데리고 와 꼭 안는다.

엄마도 딸도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채 서로를 꼭 껴안고 엉엉 우는 장면이 나오면 나도 여지없이 따라 운다. 재방, 삼방을 봐도 도저히 무뎌지질 않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살면서 제일 후회하는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최근 JTBC <슈가맨>을 보면서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가수 양준일의 이야기를 보면서다. 시대를 앞서 간 아티스트의 무대는 30년 전에도, 30년이 지난 지금도 멋져보였지만, 삶의 태도는 더 근사했다.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던 활동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된다고 말하는 모습이, 순수한 20대 청년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아 어쩐지 뭉클했다.

찾아본 유튜브 영상 댓글에는 저 모습 그대로 빼내 활동하게 해주고 싶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안타까운 진심들에 또 눈물이 찔끔. 정말이지 요즘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엇박자’들에 자꾸 눈물이 난다.

그래서 시간 여행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최근엔 정말 이상한 꿈까지 꿨다. 그 꿈속에서 나는 시간여행자였는데, 지금의 ‘상암MBC’가 아닌 여의도 MBC 시절, 그것도 내가 입사하기 전의 MBC 라디오 스튜디오 앞에 있었다. 그곳엔 지금과 달리 너무 젊은 모습의 선배 PD들이 한창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허름한 스튜디오 곳곳엔 활기가 넘쳤다.

지금 중견급인 어떤 선배는 이제 갓 입사했는지 어리바리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고, 곧 안식년을 앞두고 장난스럽게 매일 남은 날짜를 세며 출근하는 모 선배는 특유의 요란한 포즈로 신나게 큐사인을 주고 있었다. 또 어떤 선배는 뭔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스튜디오 앞을 휘젓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 몰랐지만, 나는 그들이 앞으로 겪을 일들과 현재의 모습을 안다. 기분이 이상해져 울면서 깼다. 공교롭게도 출근해 꿈속에서 젊었던 선배들 중 하나와 마주쳤고, 그 앞에서 또 눈물이 나는 바람에 아침부터 상당히 이상한 사람이 됐다. (그렇게 또 흑역사를 경신했다.)

사실 조만간 ‘라디오 시대’를 주름 잡았던 걸출한 선배 PD들이 정년을 앞두고 우르르 회사를 떠난다. 떠난 자리는 얼마나 휑할까, 아직도 헤매는 중인 못난 후배로선 벌써부터 걱정이다. 환송회마다 얼마나 주접을 떨려고 미리 이런 꿈까지 꾸나 싶다.

멋쩍어서 자꾸 사람을 울리는 ‘시간’에 대해 공부해봤다. 물리학 책 몇 권을 겨우 읽고 어설프게 이해한 바에 의하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란 단독의 개념은 정확하지 않다는 거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의 짜임 속에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통되는, 또 명징한 ‘지금 이 순간’은 없다고 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연장된 현재’가 있는데, 사건이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이것의 지속 시간은 길어져서, 안드로메다은하까지 개념을 확장시키면 ‘현재’의 지속은 2백만년까지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지금!’이라고 외쳐봤자, 나와 이 순간을 공유하는 존재는 엄격하게 따지면 없거나 희박하다는 말이다. 모두에겐 각자의 시공간이 있으며 그 시공간의 울림이 어쩌다 마주쳐진다는 의미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평소엔 알아채지 못하듯, 이런 시간 개념 역시 인식하기 어렵다. 놀랍기도 하고 어려워 주변 선배들에게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더니 껄껄 웃으며 그 나이 때가 되면 한번은 빠지게 되는 공부라고들 했다. 놀라워라.

시간의 엇갈림, 회한과 안타까움은 어쩌면 세상의 이치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각기 다른 시간이 우연히도 마주쳐 내 시간을 울리고, 마음마저 움직이게 한다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주위의 모든 게 새삼스러워졌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매개로 ‘실시간’을 함께하는(혹은 한다고 믿고 있는) 모든 분이 새삼 감사하다.

시간의 엇박자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자꾸 생겨난다면, 허락된 시간 안에서 내가 바꿔볼 수 있는 걸 부지런히 찾아야겠지, 촌스러운 다짐을 하며 2019년 세밑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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