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울 것 없는 송년회, 올해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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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 것 없는 송년회, 올해는 달랐다
[라디오 큐시트] '누구도 하지 말자' 나서지 못하는 송년회, 동료 사진 통해 1년 돌아보니
  • 박재철 CBS PD
  • 승인 2019.12.2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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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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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주차 과태료 고지서는 언젠가 올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두 손에 쥐고 나면 께름칙한 대상이다. 받는 순간 종이 구겨지듯 마음이 몇 겹으로 접힌다. 

연말 송년회도 비슷한 심사를 자아낸다면, 좀 과장일까. 올 한해 수레바퀴 자국 같은 의미들이 가슴 속에 남았다며 자평하기에는 좀 남세스럽다. 작년과 올해는 대체적으로 데칼코마니다. 

남의 옷을 입을 때 전해지는 어떤 헐거움 같은 격려의 말을 서로에게 건네는 것도 계면쩍다. 상대나 나나 그 말 값을 후하게 쳐주지 않는다. 앉아서 즐길 처지가 아니라 서서 애써야 하는 처지라면 더욱 그렇다. 비호감의 과태료 딱지다. 송년회 행사의 기획과 연출도 일종의 노역이다. 비자발성으로 충만하다.

매년 하는 것이지만 그게 꼭 건너뛰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어서  동원 거부에 취약한 후배들이 애꿎게 차출된다. 한해를 뒤돌아보면 빨리 지나간 것밖에 없고, 또 그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는 애들을 데리고 작년에 이어 다시 뭔가를 꾸리게 됐다.  

조용히 지나가면 좋으련만 서로 그러고 싶어 하는 듯 보여도 나를 포함해 아무도 “하지 말자” 선뜻 나서지 못한다. 노래와 장기, 꽁트와 만담 등으로 얼개를 만들다 보니, 사진 슬라이드로 국원(局員)들의 대소사를 짤막하게 정리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받아 시간대별로 쭉 연결하니 나름 스토리 라인이 만들어졌다. 어두운 사무실에서 5분 남짓한 시간, 넘어가는 사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마음에 물결 같은 잔무늬가 일었다. 

술자리, 벌겋게 달아올라 회사 욕을 한창하고 있는 듯한 어느 선배의 가는 턱선, 방송 스튜디오에서 골똘히 모니터를 응시하는 눈동자, 섭외가 난항을 겪는지 전화기를 절벽 로프줄 잡듯 꼭 쥔 간절한 손, 주조 대기실에서 시간에 쫓겨 자장면을 입가 가득 밀어 넣다 잡힌 허기의 순간, 사내에서는 늘 찡그리던 십년 차 후배가 첫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 어느 따사로운 봄날, 인사동 거리를 팔짱 끼고 일열 종대로 걷는 신입들의 청순함, 수상의 기쁨을 감출 수 없다는 듯 꽃다발 뒤로 보이는 수상자의 만족스런 표정, 그리고 퇴사를 앞둔 어느 선배의 가지런한 책상이 주는 묘한 경건함...

가벼운 일상이지만 그 가벼움이 투명함으로 다가와 내 눈에서 잠시 빛났다. 사진은 기록의 기능이 클 테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보는 이에게 사건을 현재화한다. 한 장의 사진으로 묵혀둔 과거의 일이 “지금, 여기” 나에게로 순식간에 다가와 현재형이 된다. 과거의 무엇이 아닌 지금의 것이 되면서 새롭고도 낯선 분위기로 보는 이를 이끈다. 굳이 그때를 기다려 찍으려 했던 사진은 많지 않다. 그냥 우연히, 그때 거기서 홀로 혹은 함께, 그 시간을 통과한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그 흔적들이 사진이라는 격자에 담겨 오늘 새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이 실은 몇 만 광년 전에 어느 곳에서 쏘아진 빛인 것처럼, 사진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 "그 장소에 있었다"라는 과거의 원초적인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 환기시킨다. 그 환기 속에서 다양한 감정이 추체험된다.

프랑스의 문예비평가인 롤랑바르트는 이런 사진의 특성을 ‘푼크툼’이란 용어로 설명했다. 일종의 수용미학 용어일 텐데 사진은 보는 이에게 대체 불가능하며 고유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데, 그것을 ‘푼크툼’이 명명했다.

이 용어는 원뜻이 찌름이라는 라틴어 ‘punctionem’에서 왔다고 한다. 보는 이의 마음을 찔러대는 사진의 마법, 나는 5분짜리 사진 슬라이드를 보면서 그 마법에 잠시 현혹됐다. 그때의 사진의 역할은 뭐랄까...헬륨 가스를 머금은 풍선에 무거운 추를 다는 일 같았다. 위로 올라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기억에 중력을 부여하는 일과 흡사했다.

한 장의 사진은 사진 속 때와 장소, 사람과 사건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었다. 사진들이 전해주는 내밀하고 짙은 감상으로 인해 어쨌거나 올해의 송년회는 나에게 여느 송년회와는 좀 다른 무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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