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패 문구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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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왜 감사패 문구는 비슷비슷하나...산행과 닮은 리더의 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0.01.07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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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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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이맘때면 어느 조직이나 신년 인사(人事)가 한창이다. 사람이 들고 나는 것도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자연의 이치인 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차가 됐다. 

그러던 와중에 낯선 일 하나를 떠밀리듯 맡게 됐다. 바로 전임 국장에게 건넬 감사패 문구를 쓰는 일이다. 인터넷에 ‘감사패’를 검색해보니 다양한 감사 문구들이 쏟아졌다.

“귀하는 평소 남다른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만남과 헤어짐은 자연의 순리이건만, 차마 아쉬움만은 감출 길이 없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성실함을 발휘하여...”  

이름만 바꾸면 될 정도여서 쉽게 쓰자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그건 감사패에서 ‘감사’의 마음을 지우고 ‘패’만 남기는 일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대안이 있지도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물이 턱밑까지 차올라 억지로라도 손발을 허우적거려야 할 처지가 됐다. 

적어도 상투성만은 배제해보자는 궁리 끝에 떠올린 이미지는 ‘산행’이었다. 등산과 하산을 취임과 퇴임에 빗대는 게 다소 식상한 듯싶었지만, 그간의 과정과 고단함을 비유하기에 산행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산을 오를 때 품게 되는 ‘인상’과 조직의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갖게 되는 ‘단상’을 하나씩 병치시켜 보았다. 

우선은 시야다. 시야가 높아지면 달리 보인다. 가시권을 넓히는 것은 역시 위치성이다. 그러나 높아지면 바람 또한 거세진다. 부딪혀야 할 저항과 반대도 커진다. 앞자리에 선 사람은 그것을 무릅쓰며 한 발 두 발 내딛으며 길을 내야 한다. 뒷사람은 그의 행로를 따른다. 길의 방향은 물론, 걸음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앞서 산행하는 자의 몫이다.  

몸의 수고스러움이나 뒤따라오는 이들의 원성은 사실 두 번째다. 첫 번째 고충은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 길인지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르는 불안이다. 그러나 그것은 감춰야 할 동요이고 덮어야 할 분란이다. 내색하면 산행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자로서의 산행은 크든 작든 이처럼 나누기 힘든 고독과 피하기 힘든 결단의 순간을 예비하고 있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 역시 이런 산행 이미지의 단편들과 그 끝이 자연스레 포개진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 짧은 한 편의 시, 그리고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으로 끝나는 어느 노랫말에서 감사패의 밋밋함을 조금 덜어내 줄 의미 있는 착상을 훔쳐왔다. 
 
그렇게 얼기설기 엮다 보니 아래와 같은 감사패 문구를 쓰게 됐다. 쓰고 나니 멋만 부리다가 감사패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조금 앞섰지만, 궁리의 시간들에서 놓여날 수 있어서 홀가분했다. 모쪼록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감사패 문구 작성이 되길 바랄 뿐이다.  

산을 올랐던 이들은 안다.

힘들게 오른 만큼, 산은 다른 풍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한 발 두 발 묵묵히 발을 내디딜수록 자신의 시야도 변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안다. 높이 오를수록 바람도 거세진다는 것을.
산을 오르는 일은, 거센 바람을 맞으며 홀로 자신을 다독이는 일이며,
그러면서도 앞으로 길을 내는 일이다.

불안하고 불확실해도 내색해서는 안 되며
설사 길을 잃어도 마음을 잃으면 모든 걸 잃기에,
혹여 산정(山頂)에 다다랐어도 그곳은 거대한 산맥에서 하나의 봉우리일 뿐임을 알기에.

그러니 자만은 내치고 자족은 품어도 된다.
산은 내려올 때 더 많은 풍경을 예비하고 있다.

4년의 외롭고 고된 산행을 마친 
국장님께 깊은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2019년 12월 31일 편성국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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