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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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24] '장애학의 도전'

2016년 영국의 방송사 채널4에서 리우 패럴림픽 트레일러 영상으로 올린 'We’re the Superhumans' 영상.
2016년 영국의 방송사 채널4에서 리우 패럴림픽 트레일러 영상으로 올린 'We’re the Superhumans' 영상.

[PD저널=오학준 SBS PD] 몇 달 후면 도쿄 올림픽과 도쿄 패럴림픽이 열린다. 이맘때쯤 되면 방송사는 너나 할 것 없이 분주해진다. 특집 방송 제작하랴, 중계 편성하랴, 그래픽 제작하랴 다들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려면 눈코 뜰 새가 없다. 잠시 회사를 떠나있다 돌아와서 분주한 사무실의 공기를 맡다 보니 4년 전 리우 올림픽·패럴림픽이 열릴 무렵이 떠올랐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영상이 하나 있다.

2016년 영국의 방송사 채널4에서는 리우 패럴림픽 트레일러를 하나 만들었다. 트레일러의 제목은 <We’re the Superhumans>. 영상은 태어날 때부터 팔이 없었던 드러머 앨빈 로의 흥겨운 드럼 비트로 시작한다. 뒤이어 척추갈림증으로 휠체어에 앉은 가수 토니 디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의 <Yes I Can>에 맞춰 다양한 선수들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애런 포더링험의 휠체어 스턴트 장면을 보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다.

3분 정도의 짧은 이 패럴림픽 홍보 영상은 비단 대회에서 땀 흘리는 선수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들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운전을 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들은 각종 대회에 참여하는 모습과 위화감 없이 서로 포개어졌다. 후반부에 너는 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학교의 담당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김도현의 저서 <장애학의 도전>은 이처럼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 구조가 장애의 원인임을 지적하는 책이다. 이 책은 수십 년 간 활동가이자 이론가로서, 그리고 ‘비장애인’으로서 장애 문제에 대해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고찰했던 결과물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손상이 아니라 차별이 장애를 만든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장애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우직하게 독자들에게 밀어붙인다.

장애인은 보통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그들이 이렇게 ‘무능력’한 이들이 된 건 그들의 몸과 정신에 손상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행하게 할 역량을 제공해주지 않는 사회적 시선이 더 문제다. 장애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는 서사에 눈물을 흘리고, 동정과 연민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도록 전형적인 삶을 살아주길 요구하는 사회가 그들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장애인’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발명된 개념이다. 개별적인 장애인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들을 한데 묶어 ‘무능력한’ 이들로 분류해낸 건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궤를 같이한다. 임노동을 할 능력이 없는 이들은 국가에 의해 비정상으로 분류되었고, 그 일차적 대상은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제거되거나 숨겨져야 할 존재들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장애인은 하나로 묶일 수 없다. 다양한 신체적/정신적 손상을 지닌 사람들끼리의 소통은 비장애인과의 소통보다 때로는 어렵다. 또한 한 사람은 장애인인 동시에 다양한 정체성을 지닐 수 있다. 그들의 개별적인 상황과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장애인’이라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은 여전히 그들을 주변화 하는 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답습하는 꼴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를 개인의 인식 변화나, 당사자 정치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차별을 구조화하는 사회를 바꾸고, 동등한 존재로서 인정받고,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분배-인정-정치의 세 차원에서 동시에 정의를 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공공시민노동(활동)’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비장애인들은 자립과 의존을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이 주어진다는 것이고, 장애인들은 그것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묻는다. 왜 장애인은 ‘기생’하는 삶으로 그려지는가? 실은 모두가 서로의 부분인데도 말이다.

김도현 저서 '장애학의 도전'
김도현 저서 '장애학의 도전'

저자는 아렌트의 ‘활동’ 개념에 준하는 노동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시민들이 일정한 수준의 급여를 보장하는 공적 일자리를 신청하고, 이를 시민들 스스로 심사하여 인정받는 공공시민노동(활동)체제를 통해 장애인들의 생존은 공공시민노동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생존이 기여가 될 수 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경계는 생각보다 유동적이다. 사고로 인해 후천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얻을 수도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때는 장애로 여겨지지 않던 영역이 장애로 판정되기도 한다. 이 경계의 유동성을 인정한다면, 장애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사회 속에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행위들에 동의를 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노동의 개념을 확장해 가며 노동과 생존을 같은 층위에 놓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노동 대신 구성원으로서 누리는 최소한의 권리를 근거로 기본 소득을 요구하자고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좀 더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정의로울지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를 여기까지 진전시키기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책의 가치가 손상 된다 보긴 어렵다.

장애를 불행하게 느끼는 장애인이 있을 수 있다. 영상 속 장애인들처럼 모두가 의욕이 넘치거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장애가 구성된다 해도, 개인이 느끼는 불만과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장애인들 스스로 그 불만과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을, 그들이 원할 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특혜가 아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다. 당사자-비당사자의 사이, 그리고 당사자-비당사자를 둘러싼 구조의 자리에서 저자는 장애해방의 가능성을 찾는다.

비장애인들은 사회 구조의 일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공동의 책임이 있다. 동시에 사회 구조의 한 축으로 이 문제에 목소리를 낼 권리가 여전히 있다. 주제넘지 않으면서도 당사자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지 않을 방법은 가능한가? 그의 시도는 성공적인가? 나는 쉽게 판단하지 못했다. 그간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탐색하는 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실하지 못했고, 그만큼 글에서 내 부족함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좋은 서평들이 있음에도 무엇인가 말하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사람은 배워가는 과정을 통해 완전하진 않더라도 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장애를 비하하는 데 여념이 없는 공당들도, 자신의 삶과 장애의 거리를 애써 벌리려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나처럼 여전히 일터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이들에게도 이 책이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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