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약속 잘 지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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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약속...새해 최우선 목표로 세운 이유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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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허항 MBC PD] 시간 약속에 조금 예민한 편이다. 회의든 촬영이든 사적인 자리든, 약속된 시간보다 최소 5분은 일찍 도착해야 마음이 편하다. 가장 괴로울 때는, 집에서 분명 일찌감치 출발했는데 예기치 못한 교통상황으로 지각이 확정되었을 때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라고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의 내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못나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그런 편은 아니었다. 학창시절의 나는 5분 거리에 학교를 두고도 지각을 밥먹듯 하는 학생이었다. 사회초년생 시절에도, 5분 10분 정도의 지각은 스스로 관대하게 넘기곤 했다. 그런 나에게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일깨워준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배우 김용건 선생님이고, 두 번째는 한 선배 PD였다. 

<나 혼자 산다> 조연출 시절, 고정 멤버였던 김용건 선생님은 당연히 모든 출연자와 스태프를 통틀어 최연장자였다. 그런 ‘큰 어르신’들의 경우, 모든 촬영 준비가 끝나고 나서 천천히 도착해도 불만을 가질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김용건 선생님은 늘 스탠바이 시간보다 30분 일찍, 때로는 1시간 이상 일찍 도착해 계셨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말이다. 전날 늦게 드라마 촬영을 마쳤든 날씨가 춥든 덥든 변함이 없었다.

수십 년 배우 인생을 그렇게 깔끔한 시간 관념으로 살아오셨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일찍 와서 바람도 쐬고 좋죠 뭐”라고 막내 스태프까지 존대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김용건 선생님은 나에게  ‘품격 있는 어른’의 상징으로 마음에 남아있다. 

두 번째 선배 PD는 규모가 큰 주말 버라이어티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답사와 촬영 일정이 빽빽했다. 새벽 동트기 전에 상암동을 출발해 지방으로 가야하는 스케줄이 많았다. 그런 스케줄 속에서는 PD가 한두 번쯤 지각을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을텐데, 내 기억으로 선배님은 단 한 번도, 단 1분도 출발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새벽 네시면 네시, 여섯시면 여섯시, 서브피디였던 내가 헐레벌떡 촬영차량을 타면 선배님은 늘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신기한 것은, 프로그램 초반에는 스태프들 중 한두명이 꼭 지각을 해 출발이 지연되곤 했었는데, 언젠부턴가 수십 명의 스태프 중 단 1명의 지각자도 없이 정시에 촬영장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수장이 칼 같으니, 그가 이끄는 공동체의 시간 개념도 자연스럽게 철저해진 것 같다. 흡사 KTX처럼 정해진 시각에 줄지어 출발하는 촬영차를 타고 가며,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것이란 사소하면서도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PD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인식시켜주는 중요한 척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서는 잘 정리돼 있는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것 같다.

여유롭게 촬영장 주변을 산책하시던 김용건 선생님의 뒷모습, 덜 말린 머리라든가 헐떡이는 모습이라곤 보여준 적이 없이, 늘 먼저 촬영차에 타고 있던 선배의 옆모습. 그것이 나에겐 ‘참 멋있는 사람’의 상징으로 마음속에 각인돼 있나 보다.

설 연휴가 지나고, 이제 진정한 2020년의 시작이다. 공교롭게 2020년 시작과 함께 새 프로그램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각보다 할 것도 많고, 만날 사람들도 많다. 그런 가운데, 일단 최우선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역시 ‘시간 약속’이다.

회의 시간을 잘 지켰을 때, 출연자와의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을 때 느끼는 여유와 자신감은 생각보다 크다. 마치 첫 단추를 잘 꿰고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렇게 성실히 지킨 시간들 끝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성실함이 반드시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작은 약속들, 특히 시간 약속들에 충실했던 한 해라면 적어도 후회는 없지 않을까. 잘 지킨 시간 약속들 뒤에는 소중한 인연이라든가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 같은 것은 조용히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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