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필독도서 25]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은폐된 북관동 연쇄아동납치살인사건'

2019년 12월 23일 검찰이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과 관련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앞서 검찰은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는 재심 청구인 윤 모씨의 체모에 대한 국과수 감정서가 허위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뉴시스
2019년 12월 23일 검찰이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과 관련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앞서 검찰은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는 재심 청구인 윤 모씨의 체모에 대한 국과수 감정서가 허위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17년간 살인죄로 복역한 사람이 있었다. 징역형의 근거는 구속 상태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자백한 진술이었다. 법원에선 거짓된 자백이라 항변했지만 판결은 변하지 않았다. 출소한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방송을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물적 증거랄 것은 없어졌고, 결백을 말하는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는 날들이 늘었다. 헌데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 없는 피해자의 억울함과, 대신 죄를 뒤집어 쓴 이의 억울함을 푸는 데 지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때로는 사람을 죽였다는 진술도 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이 급했다. 최선을 다해 방송을 했지만, 능력의 부족 탓인지 반향은 없었다. 재심은 허락되지 않았고, 진범의 실마리는 잡지 못했다. 이후 시사 프로그램은 떠났지만,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와 달리 억울하게 수감된 이의 재심을 이끌어낸 사람이 있었다.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의 저자 시미즈 기요시다. 일본 니혼TV의 기자인 저자는 2007년 한 미제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다섯 명의 아동이 인근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실종되거나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보통의 미제 사건과는 조금 달랐다. 범인이 이미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다섯 건의 범죄 가운데 세 건에 대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진술을 했고, 피해자의 유류품에는 자신과 같은 DNA 정보가 있었다. 유죄율 99.8%에 달하는 일본 형사사건의 특성 상,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난 셈이었다. 

저자는 위화감을 느낀다. 범인은 세 건 중 두 건의 사건에 대해선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물증이 없었고, 자백의 내용은 모호했다. 위험한 생각이지만 만약 나머지 한 사건도 거짓된 자백과 조작된 물증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는 억울하게 잠들어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진실을 파헤쳐보기로 결심한다. 

현장이라는 탄탄한 바닥 위에서 바라보니, 자백과 물증이라는 범죄의 두 기둥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취재를 시작하자 자백을 지탱하던 주변인들의 증언은 금세 허물어졌다. 맞지 않는 증언들이 삭제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났고, 재현해보니 말이 되지 않는 증언들도 확인됐다. '담보'가 있는 관청의 말만 받아쓰던 기자들이 없는 현장엔 진실이 파편처럼 남아 있었다.

DNA라는 물증을 무너트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검찰과 경찰은 재검증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저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때 예상치 못한 길들이 나타났다. 그가 진심으로 다가간 유족들은 과거 수사의 빈 구멍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주변인들의 DNA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던 수사 당국의 검사 결과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일본 니혼TV 기자인 시미즈 기요시가 쓴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일본 니혼TV 기자인 시미즈 기요시가 쓴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1년에 걸친 기나긴 취재를 통해 그는 말한다. 관청으로부터 나오는 정보를 받아쓰기 바쁜 기자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인 수사 당국, 그저 변명할 뿐인 관료들 모두가 문제적 시스템의 일부였다고. 이 사건은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제 역할을 다 해줬다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다. 

무죄를 이끌어 냈지만 그는 여전히 취재 중이다. 문제를 만드는 시스템은 큰 변화가 없었고, 가장 중요한 진범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맡았던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일본을 움직인다’는 최종 목표는 지금도 달성되지 않았다.

그의 보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부분적인 성공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특수한 결과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사건을 재구성할만한 증거들을 다시 모을 수 있었고, 1년 가까운 집요한 취재를 가능케 한 상부의 지원이 있었다. 아웃사이더의 자리인 시스템 바깥은 이번 사건에선 진실에 한발 더 가까운 위치였다. 사건을 대하는 그의 진심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모두가 그처럼 일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출입처로 출근해 ‘담보’가 있는 기사를 생산해야 한다. 사초를 쓰는 사관처럼, 기자 중 누군가는 다른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스스로 도취되지 않고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기란 어렵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의 취재 방법이 진실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 말하지 않는다. 삶과 일이 온전히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강제할 수도 없다. 

그는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고작 초밥 한 그릇에 넘어가 감당키 어려운 프로그램을 떠맡을 정도로 무모한 사람이었고, 매일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 고민에 시달리는 이였다. 하루하루 이륙결정속도에 다다른 비행기가 된 심정으로 살았다는 그는,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이륙과 착륙에 내기를 걸어야만 했다. 그의 보도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건 이 내기를 견뎌내기로 다짐했기 때문은 아닐까. 

매일 자신의 평범함을 바탕으로 내기를 견뎌내는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사건을 향해 고민 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을 기억한다.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음에도 억울한 사연들을 가진 이들에게 진심을 다하던 사람들이 저기 있다. 무엇으로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불시착한 채 당신들을 생각한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