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스피커로 전락한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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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 도서 26] '가짜뉴스의 고고학'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이른바 '차이나 게이트'를 조사해달라는 게시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이른바 '차이나 게이트'를 조사해달라는 게시글.

[PD저널=오학준 SBS PD]  300만. 눈을 의심했다. 가능한 수치일까? 다양한 게시판에서 긁어모은 자료들이 줄을 이었다. 주장은 간명했다. 현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수많은 중국 동포들을 동원해 댓글 공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감각이 없는 숫자보다 그 숫자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가 흥미로웠다. 믿으려면 많은 부분을 가정해야 했다. 마치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는 그랜드 크로스처럼.

더 흥미로운 건 제보를 받는다는 글이었다. 커뮤니티의 공지가 아니었다. 한 언론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 한때 언론에서 UFO의 존재에 대해서도 제보를 받던 때가 있었는데 뭐 새로울 게 있을까. 다만 이렇게 진지해지면 문제가 좀 심각해진다. 게시판 소문은 기사가 되고, 기사는 다시 소문의 근거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근거로서 인준하는 체계에서 진실은 관심 밖에 있다. 누군가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 그 주장이 근거가 희박하다 반박해도 소용없다. 이미 정치권에선 이 소문들을 받아들고 검찰로 향했다. 그들이 언론을 향해 내뱉는 말들은 다시 기사가 된다. 그리고 그 기사는 다시 소문의 진원지로 흘러들어간다. 거짓의 순환구조가 이렇게 완성된다.

‘대안적 진실’이라는 게 별 게 아니다. 공신력 있는 매체가 소문을 따옴표 쳐서 보도하고, 그 보도를 다시 정치권에서 인용해 발언하고, 그 발언이 다시 보도되면, 소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가 생겨난다. 올드 미디어 종사자들이 ‘가짜뉴스’를 자기들 바깥에서 생산되는 무언가로 믿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거대한 원환 속의 부분으로 이미 자리 잡고 있다.

<가짜뉴스의 고고학>은 그러한 원환 구조의 얼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가짜뉴스, 거짓말, 소문, 괴담과 같은 ‘허위정보’가 언제부터,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짚어본다. 

그가 보기에 정보 생태계에서 거짓과 허위정보는 그 양태가 조금씩 달라졌을지언정 언제나 존재했다. 정적을 거꾸러트리기 위해, 여론을 이끌어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정치적 술수로서 허위정보들을 생산했다. 허위정보를 생산하는 비용은 언제나 그것을 통해 얻게 될 개인적인 이득에 비하면 저렴하기에, 근절된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은 미디어 기술의 발달에 조응하며 조금씩 변했다. 구전된 소문으로, 혹은 벽에 붙은 대자보로, 그것도 아니면 하늘에 날리는 ‘삐라’의 형태로 전달되기도 했다. 때로는 거짓인 줄만 알았던 소문이 진실로 밝혀진 적도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통치자가 언로를 틀어쥐고 진실을 숨기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의 유래를 짚어본 '가짜뉴스의 고고학'
가짜뉴스의 유래를 짚어본 '가짜뉴스의 고고학'

다만 사상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거짓이 부딪히면 끝내 살아남는 것이 진실이라 믿었다. 형태가 어떠하든, 수많은 의견들이 서로의 진실을 검증하다보면 시장에서 진실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규제와 자율의 회색지대는 이 믿음에 기초하여 그 자리를 보전했다. 헌데 정말로 그랬나? 

최근, 민주주의의 취약한 토대는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발달한 거짓‧허위정보들로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진리가 거짓에 승리한다는 믿음은 시장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 ‘대안적 사실’은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는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만한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뉴미디어뿐만 아니라 올드 미디어들도 이러한 혼란을 부추긴다. 작년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유해한 콘텐츠로 뽑힌 건 ‘지라시’나 ‘낚시성 기사’가 아니었다. 사실 확인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올드 미디어의 오보들이 1위였다. 올드 미디어 종사자들은 가짜뉴스를 뉴미디어의 탓으로 돌리지만, 올드 미디어가 그 악의적인 소문들을 지면으로 끌어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 소문들이 정치의 장에서 울려퍼질 만큼 ‘증폭’되지 않았다면 그건 가짜 ‘뉴스’도 되지 못했다.

저자의 문제의식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거짓과 허위정보는 언제나 있었다. 거짓을 확산시키려는 이들은 언제나 적은 비용으로 큰 이익을 얻는다. 그들 중 하나를 때려잡는다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 달아주는 스피커의 품질을 고민해야 한다. 그 스피커란 바로 플랫폼으로서 뉴미디어, 그리고 올드미디어다. 

그간 스피커의 품질은 과연 어땠을까. 수많은 언론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신들을 향한 대중의 신뢰를 지켜내기 위해 힘을 쏟는 사람들이다. 대중매체가 처음부터 진실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언론인에 대한 대중의 신화적 믿음은 그 토대를 얻었다.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저널리즘이 복무할 수 있었던 건 그 믿음을 유지하려 애쓰는 이들 덕이다.

그런데 현실이 녹록지 않다. 열독률은 떨어지고 시청률은 하락하고 있다. 원하는 정보를 쉽게 큐레이션할 수 있게 된 독자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들로 세계를 구성하기 더 쉬워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언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부실한 취재를 하고, 자극적인 표제를 뽑고, 소문을 길어 올리고 있다. 분투하는 동료들의 노력이 손쉽게 헛수고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그런 누군가에 대한 비판은 가능할까. 얼마 전 코로나19 사태를 두고 벌어진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는 칼럼이 한 일간지에 실렸다. 맞는 말들이었지만 한편으론 무기력해 보였다. 자기가 속한 회사의 보도들을 그 칼럼으로 재단해본다면 꽤 아팠을 것이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 안으로 파고들지 못한다면 독자들에게 남는 건 냉소뿐이다. 

물론 할 수 있는 말의 범위는 좁다. 미디어 사업의 경제 구조 안에서 개별 언론인들의 윤리만을 지적하는 건 단편적이다. 독자들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높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상황들을 도외시하는 지적은 무책임하다. 쉽게 누굴 비난하고, 누굴 탓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면 애초에 가짜뉴스가 논란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짧은 글로 명료한 답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건 쓰는 사람의 욕심일 것이다. 그러니 글들이 언제나 힘이 부치는 것도 다소 사실이다. 복잡한 상황을 보고 듣고 겪었기에 망설여서일까.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그렇게 꺼낸 목표가 북극성보다 더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자책을 거두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계속해서 지니고 있어야 할 자신의 윤리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론 맥락을 위해 사실을 비틀기보다 사실을 통해 맥락을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를, 다른 한편으론 사실이라는 별이 만들어내는 별자리의 윤곽을 언제나 더듬어보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만이 남아있는 유일한 좁은 길이 아닌지. 그러나 이 말도 과연 누군가의 마음으로 파고들 수 있는지 생각하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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