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으면 안되는 후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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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27]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21대 국회의원선거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2일 인천 연수을에 출마한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정일영 후보가 해양경찰청 앞에서, 미래통합당 민경욱 후보가 동막역 앞에서, 정의당 이정미 후보가 캠퍼스타운역 앞에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시스
21대 국회의원선거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2일 인천 연수을에 출마한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정일영 후보가 해양경찰청 앞에서, 미래통합당 민경욱 후보가 동막역 앞에서, 정의당 이정미 후보가 캠퍼스타운역 앞에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코로나19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면, 민주주의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전망은 불투명해 보인다. 이 예외 상태를 끝내는 권한은 오로지 정부에게 있고, 인민은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지지하는 듯하다. 권위주의 정부와 민주주의 정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민주주의의 기초를 잠식하는 상황은, 민주주의에 기생하던 포퓰리스트들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할 최선의 기회다.

아마도 지금이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다시 펴 보기 적합한 때인 듯하다. 민주주의 제도들을 이용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이들이 어떤 공통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저자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포퓰리즘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포퓰리즘은 정치에 대한 특정한 도덕적 상상이다. 그 상상 속에는 한 편에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이, 다른 한편에는 부패하거나 비도덕적인 엘리트가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이러한 국민을 대표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집단으로서, 반대편의 엘리트들을 '숙청'하는 임무를 떠안는다. 

이러한 반 엘리트주의에 반 다원주의가 결합된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것은 곧 국민을 반대하는 것이며, 이는 부패한 엘리트들의 반항이거나 비국민(非國民)의 행패로 여겨진다. 심지어 자신들이 선거에서 패배해 소수가 된다 해도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진정한 국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발생하는 ‘착시’일 뿐이다. 

반대로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포퓰리스트들은 그 결과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적인 권력 교체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한다. 진정한 의지의 대변인이 권력을 획득했는데, 더 이상 정당한 권력 교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들은 걷어차인 사다리가 된다. 언론, 시민단체, 야당은 국민의 의지를 왜곡할 수 있는 매개체이기에 교정되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헌법과 국가기관 역시 집권자들의 의도에 충실하게 변경되어야 한다. 그렇게 포퓰리스트들은 민주주의를 청소한다.

얀 베르너 뮐러가 쓴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얀 베르너 뮐러가 쓴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순수하고 단일한 국민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소거의 기준들을 동원한다. 인종, 성별, 장애, 연령, 빈부격차는 흔히 이용되는 '체'가 된다. 실제로 얼마나 다양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인민을 구성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누가 ‘국민’이 아닌지를 구별하는 게 중요하다. 누가 국민인지를 물으며 그 외연을 확대하려는 시도들은 국민을 오염시키려는 획책일 뿐이다.

저자가 보기에 현대 민주주의에서 포퓰리즘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선거를 제외하면 인민은 자신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감각을 획득하기 어렵다. 대표자들이 제대로 자신들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분노와 그들 대신 직접 통치하면 이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는 환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포퓰리스트는 이를 전유해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완성시킬 수 있다 말한다. 그 약속의 결과가 어땠는지는 지난한 역사가 말해준다.

저자는 이 사라지지 않는 환상 때문에 포퓰리스트들이 민주주의를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분노를 해소할 수 있도록 대표자들이 대표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순수한 국민을 찾으려는 시도에 맞서, 누가 인민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 외양을 확장해야만 한다고도 말한다. 더 포괄적인 민주주의가 뮐러의 대답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다. 바이러스의 위협은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비상사태에서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은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오히려 권위주의 정부가 선제적으로 시행하는 광범위한 사회 통제가 더 나아 보이는 측면도 있다. 생명을 보호해 줄 권력에 복종하느냐, 아니면 버려지느냐와 같은 선택지를 코앞에 들이미는 정부에게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오래된 약점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파열음이 들린다. 반난민 정책을 앞세웠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정부가 의회를 무시할 수 있고, 기존 법률의 효력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얻는 법을 새로 제정했다. 브렉시트를 이끈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국난 앞에 야당은 반대를 그만두고 초당파적 협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을 요구하며 몇 달간 칠레에서 이어지던 시위는 ‘재난 상태’ 선언과 함께 피녜라 정부가 보낸 군대에 의해 해소됐다. 마치 문중원 기수의 분향소가 방역을 이유로 손쉽게 철거되듯이.

영국 보수당은 1943년 이래 지지율 최대치를 기록했고, 존슨 총리는 역대 영국 총리 최대의 지지율을 얻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홉스가 떠올렸던 잔혹한 세계와 다시 마주하고 있다. 집단의 생존은 복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의적인 권력을 통제하는 제도 대신, 자비로운 군주를 원하는 시대에 포퓰리스트들은 구원자의 형상을 하고 찾아온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를 쉽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위기는 기회다’라는 것 이외에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수단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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