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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01 09:00
  • 수정 2020.05.06 14:04

"20주년 '인간극장' 힘은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발견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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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20주년 맞는 KBS '인간극장'의 정수연·한성순 제작팀장
"연출도, 구성안도 없어...'인간극장'은 살아있는 문화인류학 보고서"

KBS '인간극장' 스틸컷 ⓒ KBS
KBS '인간극장' 스틸컷 ⓒ KBS

[PD저널=이미나 기자] 2000년 5월 1일 오전 8시 25분. KBS <인간극장>이 첫발을 뗀 순간이다.

숱한 프로그램이 명멸해 가는 동안, <인간극장>은 KBS 2TV에서 1TV로 자리를 옮긴 것을 빼고는 자신의 자리를 꾸준히 지켜 왔다. 16년 만에 특별한 세상 나들이에 나선 모범수의 이야기(<어느 특별한 휴가>)로 시작해 보육원에서 독립해 홀로 살던 이에게 생긴 '가족'의 이야기(<그렇게 가족이 된다>)까지 어느덧 <인간극장>은 15만여 시간, 날짜로 환산하면 6,250일 간 우리 이웃들의 삶의 궤적을 쫓았다.

1960년대부터 휴먼 다큐멘터리는 끊임없이 제작돼 왔지만, 20년 간 쉬지 않고 인간과 삶의 무게에 천착한 건 <인간극장>이 유일하다. 각 편의 주인공에게 기승전결의 서사를 부여하는 '5부작 미니시리즈' 포맷은 <인간극장>만의 특성이자 <인간극장>이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는 비결이기도 하다.

<인간극장>을 제작하는 건 제3비전과 타임프로덕션이라는 두 독립 제작사다. 각 제작사에서 <인간극장> 팀을 이끌고 있는 정수연 제3비전 제작팀장과 한성순 타임프로덕션 제작팀장은 <인간극장>에서 각각 작가와 PD로, 이제는 제작 책임자로 손발을 맞추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히로시마의 두 여자> 편과 <노총각, 우즈벡 가다> 편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나의 결혼원정기>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두 팀장에게 <인간극장>은 수많은 주인공들의 삶을 그려낸 극장이자, 동시에 자신들의 삶을 바쳐 온 무대이기도 하다. <인간극장>의 탄생과 함께 태어난 정수연 팀장의 둘째 아들이 대학 신입생으로 자라나는 동안, 이들도 이젠 대강의 일화만 들어도 그 사람의 심리가 읽힐 정도로 인간사의 '달인'이 됐다.

그럼에도 지난달 24일 만난 두 사람은 "무엇보다 출연자의 힘으로 20년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아 그들을 만날 수 있었을 뿐"이라는 말로 모든 공을 돌렸다.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출연했던 이들을 모아 잔치라도 벌이고 싶었다"는 이들이지만, 코로나19의 여파로 아쉽게도 이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아쉬운 대로<인간극장>은 그간 화제를 모았던 출연자의 후일담을 전하고, 지난 20년간 <인간극장>에 담긴 한국 사회의 변천사를 톺아본 특집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인간극장>이 만들어진 지 벌써 20주년이 됐다. 2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KBS '인간극장'의 한성순 타임프로덕션 제작팀장 ⓒ KBS
KBS '인간극장'의 한성순 타임프로덕션 제작팀장 ⓒ KBS

한성순 팀장(이하 한): 초반엔 '내 이웃'이라고 하기엔 특별한 이들이 나왔으니 '저런 삶도 있구나'하면서 봤을 거다. 2009년부턴 '보통 사람들'의 삶을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특별함을 찾았다. 누가 <인간극장>의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발견과 해석'이라고 하고 싶다. 일상에서 '기승전결'을 발견하고, 거기에 보편적 해석을 덧대면 (시청자가) 이해하기 쉬운 밥상이 차려지는 셈이다.

정수연 팀장(이하 정): <황도로 간 사나이> 편의 주인공이 말하길 방송에 나간 뒤 사업에 실패한 분들에게 연락을 많이 받았다더라. '당신을 보고 힘을 냈다'는 거다. 예전엔 나와 다른 누군가를 보는 거였다면 이제는 동질감이랄지, 동지의식을 느끼는 것 같기도 같다. 일례로 <동막골 부자유친> 편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빈소에 있는데 자꾸 사람들이 와서 인사하고 조의금을 놓고 가더란다. <인간극장>을 본 시청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온 거다.

무엇보다 다양한 삶의 배경을 가진 이들을 찾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정: 진짜 모든 매체를 다 본다. 출연자가 또 출연자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고.

한: 마을 이장님, 부녀회장, 모든 지역 네트워크를 다 동원한다. 블로그 글도 유심히 살피는 편이다. 아이템이 한참 없을 땐 발로 뛰기도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땐 '바다 간다'고 하면 여행이라고 좋아했는데, 이젠 '또 답사 가느냐'고 질색한다. (웃음) 웃긴 얘긴데,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학교에서 좀 떨어진 떡볶이 가게를 갔다가 '3대째 하는 집이고, 양념은 이러이러한 걸 쓴다더라' 등 취재를 해온 일도 있다.

촬영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한: 한 편을 만드는 데 약 8주에서 10주가 걸린다. 전반의 2~3주는 기획과 답사 기간이고, 그 다음 3주는 촬영, 2주는 편집에 들인다. 나머지 1주는 우리끼린 'AS 기간'이라고 부르는 시기인데, 3주간 밀착돼 있으면 출연자들과 정이 들어 만나서 밥도 먹고 회포를 푸는 시간이 필요해서다. 아는 사람들이 가끔 '어떻게 아직 <인간극장>을 하느냐'고 물으면 '내가 고인 물인가' 싶을 때도 있다. (웃음) 그런데 PD 입장에선 다섯 편만 하면 1년이 간다. 제작팀장이 돼서도 아이템 잡고 결정하고 방송하다 보니 1년이 금방이더라.

정: 일반적인 휴먼 다큐멘터리는 '이런 내용의 인터뷰를 들어야 한다'는 식의 구성안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극장>은 그게 없다. 구성안이 있으면 내용이 사전에 규정돼 버리기 마련인데, <인간극장>의 재미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 있거든. 촬영 나가는 제작진에게도 '그냥 가서 버티라'고 한다.

KBS '인간극장'의 정수연 제3비전 제작팀장 ⓒ KBS
KBS '인간극장'의 정수연 제3비전 제작팀장 ⓒ KBS

구성안이 없으면 <인간극장> 특유의 드라마식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 가는 것인가.

한: 답사를 다녀온 뒤 제작진 회의에서 '캐릭터가 선명하고 호감도가 있는가' '5일 내내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할 것인가' '서사가 확실하고 시청자가 공감할 포인트가 있는가' 등을 논의한다. 그리고 (아이템으로서의) 조건에 맞으면 한 장짜리 기획안을 쓰기는 한다. 촬영을 떠나기 전에 그 기획안을 바탕으로 (출연자의) 어떤 부분을 살리면 좋을 것인지를 공유하고, (촬영) 3~4일 정도에 다시 담당 작가와 제작팀장이 그동안의 영상을 보고 다시 얼개를 그린다. 우리가 사전에 생각했던 대로라면 그대로 촬영하는 거고, 다른 데 더 눈길이 간다면 다시 현장의 제작진과 이야기를 하는 거다.

정: 아무 것도 없이 가서 PD가 알아서 하라는 게 아니다. 그때그때 소통하며 방향을 설정한다는 이야기다. 작가 입장에선 <인간극장>은 대기의 연속이다. 구성안이 없는 대신, 계속 의논을 해야 한다. 내 경우 한 번은 한 시간 정도 장을 보다가 전화가 와서, 카트를 밀어놓고 한 두 시간을 통화한 적도 있다. 통화가 끝나고 보니 어느 순간 카트가 없어졌더라. 다시 장을 보려니 어찌나 화가 나던지…. (웃음)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간극장>에 출연했던 콩고 출신의 조나단이 '밀착 촬영'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 가끔 출연자들끼리 '이거까지 찍어서 방송이 돼?' '도대체 뭘 찍지?'라고 말하는 게 오디오에 잡히기도 한다. PD가 무슨 디렉션을 준다거나,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꽁무니만 쫓아다니니까.

정: 사실 방송의 대부분은 촬영 후반부에 찍힌 거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출연자가 (촬영을 의식해) 아침에 일어나 립스틱 바르고 그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 '녹아드는' 시간이 우리에겐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다 보면 결국 제작진의 관점에서 출연자를 보게 되지 않을까. 출연자의 심정을 해설하는 내레이션 역시 결국은 제작진의 주관이 섞이게 되지 않나. 

정: 아무래도 PD는 출연자와 섞여 지내다 보니, 가끔 편집본을 보면 PD의 주관이 개입돼 있을 때가 많다. 그걸 어느 정도 작가가 조절하기는 하지만, 작가도 결국 그 아이템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작팀장은 한 발짝 더 떨어져 봐야 한다. 정제되지 않은 촬영본 속, 영상을 보면 결국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한: (시청자가) <인간극장> 내레이션을 두고 어떻게 저 사람의 심정을 저렇게 해석하지,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촬영분에 담긴 시간이 만만치 않다. 흘러가는 그림 속에도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숨어 있다. 그 사람이 보이고 싶은 부분, 보여주고 싶은 부분까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만 옷 입고 대중목욕탕 안에 들어간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오랜 시간 <인간극장>을 제작하면서 나름대로 출연자의 옥석을 가리는 노하우가 쌓였을 수도 있겠다. 아픈 이야기지만, <인간극장> 출연을 '이용'하려 했다거나 <인간극장> 이후 불미스러운 일에 휩싸인 출연자도 있지 않았나.

정: '하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은 일단 의심한다. 여기저기 물어도 보고, 이웃에게 툭 '이 분 어때요?'라고 묻기도 하고. 한 번은 어떤 절에서 버려진 갓난아기를 키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답사 차 방문했는데, 너무 협조적인 거다. 그런데 둘러보니 한 곳에 후원품이 잔뜩 쌓여 있고, 자원봉사자들도 몰려 있더라. 이상하다 싶어서 안 했는데, 나중에 난리가 났다. 후원을 노린 사기꾼들이었던 거다.

한: <인간극장> 나오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모시고 싶은 분들과, 스스로 나오고 싶어 하는 분들. 전자는 거의 문제가 없는데, 후자의 경우는 자기 사업 같은 게 있어 '방송을 타야' 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5부작으로 방송하다 보면 출연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드러날 수밖에 없어, 그런 때엔 미리 '우리가 당신의 삶은 보여줄 수 있지만 그게 상품처럼 보이겐 찍지 않을 거다'라고 말씀을 드린다. 여기에 동의하면 촬영하는 거고, 아니면 촬영해선 안 되는 거다.

KBS '인간극장' 스틸컷 ⓒ KBS
KBS '인간극장' 스틸컷 ⓒ KBS

2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에 발맞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한: 아이템의 외연을 넓히는 게 가장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방법 같아서, <길 위의 닥터> 편처럼 변화을 시도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5부작 미니시리즈 형식의 다큐멘터리라는 틀과 <인간극장>의 본령을 바꾸기는 어렵다. 이번에 20주년 특집을 준비하면서 김영하 작가님을 만났는데, 그 분도 '어디서든 쭉 하고 있는 프로그램 같다'는 말을 하더라. 어떤 의미에선 <인간극장>은 살아있는 문화인류학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 물론 에필로그쯤에 바닷가를 간다든지, 그런 게 굳어진 부분은 있다. 그런 건 이제 덜어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딜레마도 있다. (변화를 주려고) 시그널 음악을 바꿔볼까, 뭘 더 해볼까, 별 걸 다 생각해 봤는데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순간 <인간극장>이 <인간극장>이 아니게 되는 것 같더라.

2000년대 초 <인간극장>을 필두로 한때 휴먼 다큐멘터리 붐이 일었던 적이 있었는데, 요즘 다시 휴먼 다큐멘터리가 많이 제작되는 추세인 것 같다. 이른바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인간극장> 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한: 한동안 <인간극장>과 비슷한 느낌의 연작식 휴먼 다큐멘터리가 생겨날 때, 우린 '가시고기'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막을 내리고, <인간극장>은 쭉 제작되고 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하다 보면 <인간극장>의 틀에 시청자가 익숙해진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시청자도, 제작자도 함께한 <인간극장> 20년의 무게가 분명 있다.

앞서 말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주일 간 출연진과 제작진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그 시간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인간극장> 제작진은 '찍으러 왔으니 촬영 준비하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침에 슥 와서 '오늘 뭐하세요? 저도 같이 갈게요'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제작진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정: 어떤 출연자가 '30분짜리 휴먼 다큐멘터리 찍는데 3일 걸렸는데, 죽는 줄 알았어요'라며 '<인간극장> 안 찍을래요' 한 적도 있다. 그러면 '저흰 안 그래요' 한다. 한 팀장이 말한 그런 자세가 프로그램 안에도 분명히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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