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위로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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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당신만 겪는 고통이 아니다" 자기 고백적 위로의 힘  

tvN 목요스페셜 '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tvN 목요스페셜 '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PD저널=박재철 CBS PD] 소싯적 뭉텅이의 시간을 쟁여놓고 <태백산맥>을 집어 들었다면, 이제는 TV 리모콘을 랜턴 마냥 한 손에 쥐고 연휴의 긴 터널을 정주행한다. 드라마의 세계는 넓고 봐야 할 리스트는 길다. 그중에는 법조계, 방송계 등 전문 직종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제법 많다. 업종을 둘러싼 담벽이 높아 좀처럼 안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은 데다 대중이 선망하고 관심을 갖는 직업군이라 그럴 것이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메디컬도 마찬가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초를 다투며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생활상은 그 자체로 드라마다. 그러나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데고 다양한 사람들이 엮어내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일상을 메우고 있을 테다. 

요즘 사랑받고 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응팔 시리즈로 고유한 케미를 선보인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는 이번에도 끊어지기 쉬운 인물들의 감정선을 씨줄과 날줄 삼아 따뜻한 휴머니즘을 직조한다. 드라마 7회차에서는 인상적인 에피소드 두 개가 교차돼 나온다. ‘마음을 얻는 자, 세상을 얻는다’ 했던가? 빗장이 단단히 잠긴 환자의 마음을 여는 이야기다. 

먼저, 외과의 이익준(조정석)의 경우다. 자신이 집도해 남편의 간을 이식받은 환자가 상태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킨다. 약을 먹고 치료를 권유하는 의료진에게 그녀는 모진 말로 날선 칼을 만들어 휘두른다. 남편의 희생이 자신의 바람을 감추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모멸감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자기 파괴 본능으로 이 상황을 끝내고자 한다. 

익준은 이때 의사로서 권위를 내세워 치료를 강제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는 입원실에 홀로 찾아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해왔었다고. 그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겪였고, 이후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닫게 됐음을 토로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 때문에 쓰인 자신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제 환자분도 다른 이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사시라 말한다. 담담한 어조의 그의 이야기에 바위 같은 환자의 마음이 움직인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메인포스터.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메인포스터.

다음은 레지던트 3년 차인 안치홍(김준한)이다. 그는 장교로서의 군 생활을 접고 돌연 의사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동료들은 그 내막을 늘 궁금해 했지만 그는 이렇다 할 말을 삼간다. 어느 날 치홍은 경찰 출신의 한 환자의 뇌수술을 돕게 된다. 이번 수술로 인해 어릴 적 꿈인 경찰직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환자는 수술 전까지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다. 

수술은 마취를 풀고 잠시 각성 상태로 바뀌고 의사인 치홍과 환자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간다. 안치홍은 이때 그간 감춰왔던 전역 이유를 꺼내놓는다. 그는 목척추인대가 굳어지는 병을 앓았고, 훈련 중 심한 마비 증상이 와서 군을 나오게 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의사의 고백에 환자는 자신의 처지를 좀 더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화면은 치홍의 이야기 속에서 변화된 환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보여줌으로써 이를 암시한다. 각성 수술이 끝나갈 즈음, 치홍은 환자로부터 “우리 서로 파이팅하자”는 말을 듣는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두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익준과 치홍, 이 둘의 고백이 모두 공개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익준이 찾아간 병실은 다인실이다. 다른 환자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방되어 있는 공간이다. 치홍 역시 마찬가지다. 동료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을 수 있는 수술실에서 앞으로의 커리어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는 자신의 과거를 밝힌다. 

이는 제작진의 의도된 설정으로 읽힌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은밀히 오고가도 될 법한 이야기를 비교적 공개된 장소에서 밝힘으로써 환자에게 더 큰 위로를 주고자 한 것이다. “당신의 상처, 당신의 아픔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의사인 나 역시 그러했다“ 이를 공개적으로 알려주면서 말이다.  이것은 고백하는 이의 작지 않은 용기다. 

드라마 속 판검사, PD, 기자, 의사 등은 전문성을 무기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레 우위를 점한다. 자신의 치부와 환부를 꺼낼 필요도 이유도 없는 유리한 자리에 서있다. 단지 타인의 치부와 환부를 찾고 드러내는 일만 잘하면 되는 사람들. 수평이기보다는 수직에 가까운 가파르게 기울어진 관계의 구도 속에서 소위 전문직의 종사자들은 어떤 직업윤리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슬기로운 의사생활> 7회차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환자의 마음을 연 건 두 의사의 친절한 위로의 말이나 성실한 진료가 아니었다.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그냥 당신과 나, 예외 없이 같은 걸 겪었고 혹은 지금도 겪고 있다는 동일한 입장을 확인시켜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건 말처럼 쉽지 않다. 왜일까.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당사자 시점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연습과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배려와 친절,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전문직 캐릭터는 어쩌면 ‘현실의 반영’이라기보다는 대중의 ‘현실적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의 취재나 인터뷰는 어땠는지 되돌아본다. 문득 밑줄을 그어 놓았던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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