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오역과 오독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필독도서 29]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스틸 컷.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스틸 컷.

[PD저널=오학준 SBS PD] 탐정이 되고 싶었다. 복잡한 사건을 작은 단서 하나만으로도 명쾌하게 풀어내는 모습이 꽤 멋있었다. 특히 '회색 뇌세포' 에르퀼 푸아로처럼 안락의자에 앉아서도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고 싶었다.

그를 닮고자 행동과 말투를 따라해 보곤 했다. 하지만 '시럽 드 카시스’는 따라할 수 없었다. 손님들이 완강히 거부하는 그 검붉은 음료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비싸고 독특해 보이는 그 음료가 내게는 탐정의 상징 같았다. 그 음료를 마시는 포와로가 맥주나 차 따위를 마시는 영국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사람 같아 보였다.

탐정 비슷하게 방송도 하고, 차와 맥주를 홀짝댈 나이가 되어서야 그 음료가 까막까치밥나무 열매, 블랙커런트 열매로 만든 음료란 걸 알았다. ‘카시스’ 보다는 ‘까막까치밥’이 더 정겨웠고, 그 덕에 푸아로에 대한 인상도 조금 변했다. 고상하고 까칠한 탐정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달콤한 음료를 고집하는 아저씨로. 탐정을 꿈꾸지 않는 나이가 되었어도, 그 사소한 오해가 달콤한 꿈을 꾸게 했다는 사실은 남았다.

오해의 달콤한 맛을 느껴 본 아이가 자라서, 이제는 반대로 누군가를 오해의 틈바구니 속에서 헤엄치게 만드는 번역가가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김지현은 번역된 소설 속에 나온 음식을 나이가 들어 실제로 맛보면서 좌절했던 경험을 한 번역가다. 그는 꿈꾸는 날들의 달콤함을 알기에, 다시 누군가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고자 분투한다. 그 음식일기가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다. 그간 문학 작품 속 음식들을 다루는 에세이들은 종종 있었지만, 번역가의 입장에서 다루는 책은 드물었다. 

소설가 번역가인 김지현 작가가 쓴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지현 작가가 쓴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글은 간소화된 서양 코스요리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전채요리, 주식, 후식으로 나뉘어 있고, 해당하는 음식들에 관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글 앞엔 음식들이 등장하는 구절이 짧게 번역되어 있고, 독서의 경험과 음식의 사회문화적 배경들을 다루는 본문을 지나면 음식에 대한 짤막한 사전적 설명이 제공된다. 모든 글의 바닥엔 제멋대로의 독서가 가져다주는 가능성에 대한 애정이 흐르고 있다. 오독을 관통한 경험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실 우리는 모르던 세계에 제멋대로 접속하곤 한다. 아직 내 세계가 그리 크지 않던 시절엔 더욱 내 멋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라즈베리가 무슨 맛일지, 플렌스부르크 굴이 얼마나 귀한지 어찌 알겠나. 단지 가장 달콤하고 맛있었던 음식의 맛을 가져다 멋대로 상상해댈 뿐. 책을 읽고 나면 냄새와 풍경이 들어오는 경험과 단어라는 창의 모양을 더듬어보게 된다. 창의 모양이 풍경의 모양을 결정하듯, 나의 세계도 많은 것이 그 창에 의해 달라졌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간 단어를 보고 떠올렸던 음식의 모습과 실제가 많이 달랐음을 깨닫는다. <하이디>에 나오는 검은 빵이 동네 빵집에서 흔히 보는 호밀 빵이고, 이름도 생소한 ‘월귤’이 실은 키 작은 나무에 맺히는 빨갛고 조그마한 링곤베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멀리 있었던 음식과 풍경들이 순간 곁으로 다가온다. 이 책엔 이와 같이, 나와 세계 사이에 있을 다양한 음식들로 가득하다.

오래된 번역어들이 종종 우리를 오독으로 이끌어간다면, 원어를 가능한 살리는 요즘의 번역 방식은 어떨까. 오해를 피할 수 있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적절한 번역어를 선택하지 않는 건 번역가의 직무유기다. 번역되지 않은 채로 남은 언어들은 나에게서도 멀다. 여전히 경험이 적은 이들에게 문학 작품을 가까이 가져다 댈 의무가 번역가에겐 남아 있다.

얼마만큼의 거리가 적당할까. 저자는 무엇이 옳은 번역인지, 혹은 올바른 상상인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언제나 빗나가고 실패하는 지점마저도 우리에게 움직일 힘과 생각할 자유를 준다고만 말한다. 실패하기 위해서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상상의 끝이 실패라 해서 좌절하거나 멈출 이유가 없다. 독자든 번역가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포기하는 순간이다. 배신감이야말로, 또 다른 삶의 동력일 것이다.

책은 실패를 꿈꾸려는 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종종 TV도 비슷한 일을 했다. 시청자가 겪지 못한 세계의 모습과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곤 했다. 영상도 나와 남을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종류의 다리이자,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놓아온 다리가 굽어져 있진 않은지, 편견에 기대어 게으르게 지은 건 아닌지 돌아본다. 다른 사람에게 삶의 동력을 제공할 만큼, 의미 있는 ‘오역’이었는지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다. 망설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