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작가의 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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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청취자의 마음에 파문을 그리는 작가의 글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가수 한대수 씨와 방송을 같이 했던 적이 있다. 그는 방송사에 일찍 와 그날의 코너 원고를 직접 쓰곤 했다. 글을 쓰면서 간혹 미국 생활을 풀어 놓곤 했는데 토요일판 뉴욕 타임즈 구매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새벽 안개가 채 가시기 전, 길모퉁이 신문 가판대에서 집어 든 뉴욕 타임즈 한 부는 일주일을 버틸 만큼 풍족함을 줬다 한다. 마치 갓 구운 바게트를 양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 같았다고. 낯선 타국 땅에서 조부모와 보낸 쓸쓸했던 유년 시절, 웅숭깊은 서평 글들은 상처 입은 자신을 차분히 다독이는 연인이자 스승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금요일 밤부터 설레기 시작했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장 그르니에의 <섬>에 실린 까뮈의 추천 글을 떠올렸다. 카뮈의 글은 그의 <섬>을 ‘빛나는 섬’으로 만들어줬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좋은 글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을까. 신뢰와 기대를 주는 필자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 반갑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원고를 볼 때도 그런 독자의 마음이 겹쳐진다. 방송 작가의 글을 읽는 첫 독자는 아마도 프로그램 PD일 것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짜야 하는 그들의 처지는 흡사 천일야화 주인공의 운명을 닮았다. 나 같았으면 벌써 도망쳤을 글 감옥에서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호기심은 기다림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곤 했다. 20여 년간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깊이 있게 공명했던 작가의 글들을 떠올려 본다. 비교우위의 필력을 과시했던 협업 작가들의 글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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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관찰(觀察)이다. 일상의 세세한 변화와 흐름을 살핀 원고는 읽는 동안 눈웃음을 지게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여름의 무더위가 꼭짓점을 찍고 선선한 가을에 제 자리를 비워줄 즈음, 커피 주문을 재차 확인하는 점원의 말 “아이스 말고 따뜻한 거 맞으시죠?”가 부쩍 빈번하게 들릴 때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는 오프닝.

젊은 세대가 습관적으로 쓰는 “같아요”의 종결어미에서 겸양의 미덕이 아닌 어떤 주눅의 흔적을 읽어내고는 세대 간 무릎을 맞댄 자리가 더 많아져 “같아요”의 쓰임새가 예전보다 줄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인 원고도 떠오른다.

라디오는 일상에 민감할수록 공감의 폭이 커진다. 공감력을 수반한 방송 원고는 속도감 있는 돌멩이처럼 청취자의 마음에 날아가 잔잔한 파문을 연거푸 그린다. 

두 번째는 통찰(通察)이다. 통찰은 다른 이가 못 보는 걸 꿰뚫어 보는 눈이 아닐까. 관록이 붙은 작가들의 글에서는 어김없이 이 통찰이 빛나는 대목들을 만나곤 한다. ‘장애인의 날’ 읽었던 원고에서 어느 작가는 이렇게 갈파했다.

“장애인의 날인데 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 주위에 장애인이 없어서일까요? 잠시 고개가 갸우뚱해 집니다.
없다면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 이동 시설’이 없어서는 아닐까요?”

그런가 하면, 한때 어느 정치인의 연설로 유명해진 6411번 버스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새벽 노동자의 일상과 노고를 환기시켰고, 얼마 후 첫차의 배차 간격을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두고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시사 프로그램 작가의 여는 글도 생각이 난다.

정치는 슬픔을 덜어내고 기쁨을 더해주는 행위인데 그동안 우리는 슬픔을 더하고 기쁨을 덜어내는 정치만을 봐왔다며 대통령이나 장관을 바꾸는 일보다 우리의 일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정치의 본령이 아니겠냐는 지적이었다. 방송이 나간 후 울림이 컸다는 청취자들의 댓글이 많았다.

마지막으로는 성찰(省察)이다. 성찰은 반성적 사유일 것이다. 내가 찍었던 삶의 발자국, 그 가지런함과 방향성을 조용히 되돌아보는 일. 관찰과 통찰의 물줄기는 아래로 흘러 결국 성찰의 강으로 만난다. 성찰은 그러므로 한없이 낮아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타인보다 낮아져 보다 넓어지는 일.

“이해한다는 영어로 understand이죠? 이 말의 조어는 참 재밌습니다.
아래(under)에 선다(stand).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는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의 아래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런데 혹시 오늘 위(up)에 서(stand)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습관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으셨나요?”

무게와 깊이를 혼동하지 말라고 일러주는 글들이 종종 있다. 무겁다고 언제나 깊은 것은 아니라고. 가벼운데 묵직했던 모순된 순간들이 원고를 읽다 보면 찾아온다. 사건 피해자에게 연민과 동정을 보이다가도 불현듯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상반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 글이나, 위법과 적법을 나누는 법적인 다툼으로 사회가 뜨거웠을 때 이건 법의 문제가 아닌 염치의 문제로 치환해 보면 사태가 제법 선명해진다는 고언에 방송을 준비하면서 밑줄을 긋기도 했다. 
 
일상의 세목을 놓치지 않는 ‘관찰’로 시작해, 서늘하고 날카로운 ‘통찰’ 그리고 삶을 묵직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까지 매일 매일 시인의 감수성을 녹슬지 않게 벼려야 하는 방송작가들의 삼찰(三察)이 깃든 문장들은 방송의 질을 한껏 높인다. 그런 글들을 처음으로 만나는 일은 PD의 내밀한 즐거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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