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를 닮은 '정상 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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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를 닮은 '정상 인증샷'
‘다큐멘터리 3일’ 촬영차 오른 북한산에서 만난 각양각색 등산객들
등산보다 하산이 어렵다는 말의 함의는
  • 이은미 KBS PD
  • 승인 2020.06.15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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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북한산 72시간을 주제로 방송한 KBS '다큐멘터리3일' 방송 화면 갈무리.
지난 12일 북한산 72시간을 주제로 방송한 KBS '다큐멘터리3일' 방송 화면 갈무리.

[PD저널=이은미 KBS PD] 수묵화는 어렵다. 등장하는 인물도 없고, 비슷해 보이는 풍경이 흑백으로만 담겨 있으니 그림을 구분하기 어려운 게 솔직한 마음이다. 누각이나 절벽처럼 특징 있는 경치가 없다면 누가 그린 그림인지도 헷갈린다. 사실 산 자체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준비하던 아이템이 연달아 엎어졌다. 더 이상 1박2일로 답사를 가는 것도 불가능해, 가장 가까이 있는 북한산 국립공원을 방송 아이템으로 잡았다. 작년 가을부터 2030세대 젊은 탐방객들이 레깅스 같은 가벼운 차림으로 정상 백운대에서 인증샷을 찍는 트렌드가 생겼고, 코로나19 때문인지 작년 대비 45%나 등산객이 늘었다 하니 시대 흐름을 담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산에 올랐다. 

가장 유명한 코스를 골랐다. 동쪽에서 우이분소에서 출발해 865.5m의 정상 백운대를 거쳐 서쪽 은평구로 내려가는 코스다. 그런데 답사부터 난관이었다. 작가 두 명에 조연출까지 여자 네 명이 갔는데, 중간 중간 관계자 미팅을 했다고는 하지만 보통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를 총 6시간을 걸쳐 등산했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 상투적이지만 사실이다.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소리, 내 발 밑에 보이는 서울의 모습, 건너편 암벽 인수봉을 오르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잠시 세상에서 한발 떨어져 객관적인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답사와 촬영을 진행한 10일 동안 총 5번 북한산에 올랐다. 백운대 정상에서 담은 인터뷰들은 사전 섭외도 없었고, 계획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의외로 등산객들은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4년째 취업 준비 중인 청년부터 공연이 취소되어 쉬고 있다는 배우들과 태권도 시범단원들, 해외에 사업체를 두고 한국에 오는 바람에 수입 없이 인건비만 지출하고 있는 자영업자들. 그런데 이상하게 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SNS에 남길 인증샷을 찍으러 온 20대들은 도심에서 억눌린 에너지를 분출하기라도 하듯, 끼가 넘치는 온갖 자세로 동영상을 찍기도 하고 암벽 정상에서 도시를 향해 욕을 날리기도 했다. 올라온 코스도 각양각색, 정상에서 희열을 표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결국 다들 ‘자아효능감’을 확인하고 싶어 등산한 이들이다.

각양각색의 등산객의 모습은 지난 12일 방송된 <다큐멘터리 3일>에 담겼다. 그런데 못 다한 이야기가 있다. 한 중년의 등산객은 정상에서 느끼는 기분은 잠시뿐이라고,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된다고 했다. 하산 길이 험하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는 것이었을까. 

'다큐멘터리3일' 촬영차 오른 북한산 정상에서 찍은 '인증샷' ⓒ이은미 PD
'다큐멘터리3일' 촬영차 오른 북한산 정상에서 찍은 '인증샷' ⓒ이은미 PD

언제 올라오겠나 싶어 필자 역시 정상에 있는 태극기를 훈장 삼아, 인증샷을 찍고 뿌듯한 마음을 누릴 때는 거기가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하산을 시작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하반신에 통증이 왔다. 발바닥부터 올라와 무릎 관절까지 전달되는 아픔. 답사하러 온 첫 산행 때에는 얼마큼 더 내려 가야하는지 가늠이 안 되어 더 막막했다. 동행했던 조연출은 화장실을 찾지 못해 원초적 고통까지 감내해야했고, 세 번째 하산에서는 넘어져 살갗이 까지기도 했다. 

촬영 사흘째 하산은 더 험난했다. 정상에서 촬영하고 있는 촬영감독과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꼭대기에서 촬영하며 엔딩 시간이 언제인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물 하나로 하루 종일 버티고 있을 텐데... 다시 정상까지 직접 가는 수밖에 없다. 연이은 등산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기와 정신력으로 올라간다 해도 기본 체력은 어쩔 수 없었다. 설상가상 휴대폰 배터리는 다 닳았고, 하산하는 사람들만 보였다. 지난번에는 잘 올라갔던 마의 구간에서는 갑자기 고소공포증이 밀려왔다.

고생 끝에 스태프를 만나 마무리 인터뷰까지 확인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이미 하산의 고통을 알기에 마음의 각오는 하고 있는 터. 그런데 아직 절반도 못 내려 왔는데,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산은 평지보다 더 빠르게 해가 진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야간산행을 했다. 

앞에는 촬영감독이, 뒤에는 우리를 불쌍하게 여긴 등산객이 작은 랜턴으로 발을 비춰주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작은 불빛에 의존해 바닥만 보며 내려오다 보니 그야말로 무념무상이었다. 순간 휴대폰도 끊긴 채, 랜턴도 없이 혼자였다면 하산할 수 있었을까? 그대로 멈춰 서서 공포에 떨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을까?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망상에 우스갯소리를 더한 얘기지만, 셋이 아니라 두 명이 야간에 하산하는 상황이었다면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했을 지도 모른다. 등산도 등산이지만, 하산의 추억이 더 남는 촬영이었다. 

그만큼 고생했으면 지긋지긋할 만도 한데, 편집을 하면서 오히려 산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쪽잠을 자도 암벽을 오르는 이미지가 교차되었고,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과 암벽 등반하는 짜릿함, 하산할 때의 고통이 뒤섞인 심상들이었다. 
 
관심 없던 산수화들을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 산이 그 산 같이 보이던 수묵화가 이제는 겸재 정선은 어떤 봉우리를 그렸는지, 미상의 작가는 어떤 산을 담았는지 정성을 갖고 찾아보게 된다. 요즘 사람들이 산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심정으로 옛 화가들도 하산 후 산이 주는 감성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까. 산수화 화백들과 요즘 등산하는 ‘인싸’들이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닐까. 산을 사랑했던 옛 화가의 마음에 공감하며 산수화 전시회를 다시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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