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길 험난한 차별금지법, 무엇이 나쁜 차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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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길 험난한 차별금지법, 무엇이 나쁜 차별인가
[비필독도서 31] '차별이란 무엇인가'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0.07.06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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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장혜영 의원(왼쪽부터), 김종민 부대표, 배복주 여성본부장이 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정의당 차별금지법제정운동본부 발족 및 사업계획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정의당 장혜영 의원(왼쪽부터), 김종민 부대표, 배복주 여성본부장이 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정의당 차별금지법제정운동본부 발족 및 사업계획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험난한 진수식(進水式)이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배를 띄우기 위해 10명의 선원이 모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새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한 지 19년, 2006년 인권위가 정부에 차별금지법 입법을 권고한 지 14년, 민주당이 보수 개신교 단체의 항의로 법안을 자진 철회한 지 7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의원들의 이름을 달고 나타났다 사라졌던 차별금지법은 7년 만에 앞선 법안들이 머문 물가에 다다랐다.

오랜 시간 차별금지법이 표류하는 동안 괴롭힘, 혐오 표현, 간접 차별과 같은 새로운 차별의 유형이 등장했다. 개별 영역에서 차별 금지 법안들이 만들어졌지만, 이를 한 데 꿰는 일관된 기준이 되어야 할 인권위법은 그 법의 성격상 한계가 있었다. 헌법 정신에 따라 불합리한 차별을 규제하고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법안이 필요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에 찬성하는 80%의 여론은 상황의 절실함을 반영한다.

국회 청원 게시판의 숫자가 보여주듯,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 법안이 종교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없앨 거라 우려하고 있다. 이 법이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만드는 ‘공산주의자’들의 획책이란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조두순을 욕하면 잡혀가냐는 비아냥도 있다. 억지나 무지의 소산이라며 무시할 수도 있지만, 법이 제대로 사회에 안착하려면 이 법이 금지하는 ‘부당한 차별’이 무엇인지 대답해줄 필요가 있다.

오래 전 서가에 꽂아둔 데버러 헬먼의 <차별이란 무엇인가>를 꺼내든 것은 ‘차별’에 대해서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보고 대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메릴랜드 대학 헌법학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부당한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는 도덕적 토대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를 위해 부당한 차별의 정의, 근거, 구성 요건, 차별의 원인을 설명하는 기존의 논의가 지니는 한계를 따져본다.

그가 보기에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것은 종종 바람직하고 불가피하다. 가령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연령에 제한을 두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책임과 능력을 감안하여 선을 긋는 행위를 두고 부당한 차별이라 말하긴 어렵다. 문제는 그러한 구별이 “우리가 서로를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도덕규범과 충돌하게 되는” 경우다. 충돌은 비하로 인해 발생한다. 비하란 상대방을 경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불평등을 드러내는 특정한 관행적 행위다.

사회적 약자를 특징짓는 속성들의 집합인 HSD(History of mistreatment or current social disadvantage 역사적 차별대우 혹은 현재의 사회적 부당대우)는 비하를 완성하는 사회적 맥락이다. 다만 지역, 시기, 집단, 역사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하 역시 상대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에 저자는 차별의 시정이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으로서만 존재하며,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이 그 과정의 일부라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복잡한 ‘차별 퍼즐’에 부당한 차별인지 아닌지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가령 여성 노인들을 수용하는 요양 시설에서 남성 간호조무사의 취업을 제한하면 부당한 차별일까? 대학이 학생과 교직원의 선발 기준으로 정당을 활용하면 부당한 차별일까? 운이나 능력에 따른 성취로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면 부당한 차별일까?

헌법학자 데버러 헬먼이 쓴 '차별이란 무엇인가'
헌법학자 데버러 헬먼이 쓴 '차별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허용 가능한 차별, 도덕 외의 이유로 허용 불가능한 차별, 도덕적인 이유로 허용 불가능한 차별로 그 종류를 세분한다. 그 중 어떤 차별이 규제되어야 하는지 따져보고, 차별의 원인을 설명하는 기존의 논의들이 차별의 부당함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함을 논증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며 독자들은 실생활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차별 퍼즐’을 푸는 열쇠를 얻어낼 수 있다.

사실 그의 말마따나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행위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건 그 구별이 구조가 되어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억압을 유발하는 때다. 사회적 약자들이 품위의 손상을 입고 모멸감을 느끼게 되면, 증오의 감정은 커질 수밖에 없다. 증오는 폭력을 유발하고, 지배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혐오를 정당화한다. 이 과정은 반복되는 동시에 더 약한 집단으로 전이된다. 서로를 향한 항구적인 폭력과 불평등이 고착된 세계가 완성된다.

‘회원제 민주주의’는 이런 세계를 부르는 적절한 말인 듯 하다. 상대방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혐오를 전시하는 행위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하니, 조건을 갖춘 사람만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려 하는 이들이 공동체의 헤게모니를 쥐게 되는 상황이 닥쳐 왔다. 평등의 원리 앞에 부당한 차별을 소환하는 법적 근거로서 차별금지법 혹은 평등법은 민주주의 공동체의 존속을 좌우하는 최소한의 요청이 됐다.

민주주의에 언론은 약일까 독일까.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발의를 환영하고, 그 의의와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는 언론들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언론사는 혐오를 전시하는 이들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따옴표 쳐 ‘논란’이라는 키워드에 실어 보도했다. 헌법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법을 두고도 여전히 해묵은 혐오의 감정만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이라는 뭉툭한 호명이 유의미한지를 먼저 묻긴 해야지만, 차별금지법의 앞길은 험난해 보인다.

사회적 약자들을 집어 삼켜온 혐오의 파도 위에, 단번에 우리 사는 공동체가 순탄히 항해하길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혼란한 세상에 책이든 삶이든 붙잡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는 시대로 비틀거리며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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