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편제’ 배경이 대치동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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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 배경이 대치동이었다면 
'소리꾼' 이봉근의 ‘눈 먼 사람‘을 듣다 떠올린 서편제의 교훈  
  
  • 김훈종 SBS PD
  • 승인 2020.07.2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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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리꾼' 스틸컷.
영화 '소리꾼' 스틸컷.

[PD저널=김훈종 SBS <허지웅 쇼> PD] 지난 22일 <히지웅쇼>에 <소리꾼>의 두 배우 김강현과 이봉근이 출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뮤지컬 형식의 작품인데다,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독특함에 매료되었다.

배우 이봉근의 목소리에는 이유도 정체도 알 수 없는 흡입력을 그득 담고 있었다. 한 소절 무르는 노랫가락에도 줄거리를 소개하는 말소리에도 가슴을 후벼 파는 뭔가가 있었다. 이봉근이 라이브로 ‘눈 먼 사람’을 완창 하는데, 문득 <서편제>의 감동이 다시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서편제>가 상영되던 <단성사>의 추억은 오징어 냄새와 겹쳐진다. 그 시절은 단관 개봉의 시대였고, 장안의 화제작을 보려면 종로로 나가야 했다. 서울극장에서 피카디리 극장, 단성사로 이어지는 종로 거리에는 리어카마다 팔뚝만한 문어다리와 쥐포를 굽느라 분주했다. “판소리 영화?” 질풍노도의 소년에게 왠지 따분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웬걸? 영화는 눈물을 찔끔 흘리게 만들 정도로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라는 감상이 뒤이어 나오는 게 이 글의 전개상 맞겠지만, 역시나 지루할 따름이었다. 하긴 들끓는 호르몬도 감당이 안 되는 열일곱 소년에게 ‘한恨’의 정서가 이해될 리 없었을 테지. 입아귀가 아프도록 씹어대던 쥐포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당시로서는 경이적이었던 ‘백만 관객’ 돌파에, 그저 하나 더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이 마흔 줄에 가까워진 어느 날, ‘임권택 회고전’에서 감상했던 <서편제>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유봉(김명곤 분)이 송화(오정해 분)에게 독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 달리 보였다. ‘친자식이 아니어서 저런 모진 짓거리를 한 거야’라는 열일곱 소년의 해석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 자식에게 저런 짓도 할 수 있는 게 예술인가’라는 물음으로 바뀌었다. 

유봉의 판소리를 요즘 학부모들의 대학 입시로 치환하면, 또 다른 감상이 얼마든지 가능해 진다. 대치동 학원가를 가 본적이 있다면, 쉽사리 수긍할 게다. 고사리 같은 손에 제 덩치만큼 큰 캐리어를 들고 하루 종일 영어학원에서 수학학원으로, 다시 수학학원에서 독서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대치동 근처 커피숍은 밤 10시부터 알바생을 충원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로 커피숍이 인산인해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간을 특정해 아이를 데리러 오는 단순 라이드가 아니다. 아이가 주어진 문제를 모두 풀어내야 하원할 수 있는 실미도 같은 학원들이 득실댄다.  

문자 그대로 눈을 멀게 하는 독약을 먹이는 건 아니지만, 세상만사에 눈멀게 하고 오직 수학, 영어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부모들에게 묻고 싶다. 판소리가 전부라 믿어 딸의 눈을 멀게 만든 유봉과 당신은 얼마나 다르냐고. 공부만 강요해 아이들 가슴에 한을 맺히게 만드는 당신은 유봉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냐고.

<서편제> 이후 어릴 적 봤던 명작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십대 시절 보던 영화를 마흔 줄에 다시 보니, 대부분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인생의 풍파도 겪고, 경험도 쌓이고,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아이도 낳고 나니 인생이 달리 보이고 영화가 달리 보이게 된다. 오늘 밤엔 김명곤과 오정해가 함께 부른 <서펀제>의 OST <길>을 들으며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창산도의 돌담길이 꿈속에 나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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