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 인생의 프로그램 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한 ‘PD 글쓰기 캠프’가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파주 출판단지 지지향에서 진행됐다. 자기 성찰과 프로그램 질적 향상을 위해 기획된 글쓰기 캠프에 참여한 PD들이 ‘내 인생의 프로그램’을 주제로 쓴 글을 차례로 싣는다. <편집자 주>   
ⓒ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문주은 KBS PD] 우리 아빠는 TV에 나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는 구세대다. 어느 날 벌건 얼굴로 밤늦게 집에 들어오신 아빠의 한 마디. 

“이번 주 금요일에 다들 일찍 들어 온나. 아빠 테레비 나온다”

밥 먹으러 갔다가 마침 촬영 나온 맛집 프로그램 제작진의 눈에 띄어 인터뷰를 했으니 본방사수를 하라는 당부였다. 손꼽아 기다린 방송 날. 막상 TV에 나온 아빠는 ‘술에 취해 기분 좋은 아저씨3’ 정도의 존재감만 겨우 발휘했다. 아주 짧고도 특별할 것 없는 맛집 소개 멘트. 그럼에도 아빠는 충분히 즐거워 보였다. 아빠는 친구들에게 자랑 전화를 돌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인터뷰 영상을 몇 번씩 되돌려보는 것으로 TV 출연을 자축했다. 아빠를 찍은 PD에게 그날의 방송은 수백 회의 방송 중 하나였을 테지만, 아빠에게는 기억해둘만한 인생의 프로그램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PD가 사람들에게 ‘인생의 프로그램’을 하나씩 선물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존재이기만 하면 좋으련만, 막상 PD가 되어 촬영을 나가보니 텔레비전에 제발 나오지 않고 싶단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분명 그쪽으로는 카메라를 돌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찍힌 것 같으니 당장 본인이 보는 앞에서 영상을 지우라고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사람부터, 카메라만 들면 일부러 말을 거칠게 해 도저히 촬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중학생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PD는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쫄보인 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너무 어렵다. 촬영 도중 싸움이 나 “찍지 말아주세요”라고 외치는 출연자의 말에도 모르는 척 카메라를 들고 있는 선배들이나 카메라 감독님들이 때론 존경스럽다. 저래도 되나 의심이 들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 모르겠다. 내가 과도하게 몸을 사리는 것인지, 아니면 도리를 지키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머뭇거리는 사이 몇 명의 출연자와 몇 개의 명장면을 놓치기도 했다.

선배들도 언제나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동폭력에 관한 방송을 준비하는 선배는 촬영도 아닌 섭외만 하러 지역과 서울을 몇 번씩 왔다 갔다 한다. “아동폭력의 피해자를 카메라 앞에 서게 하는 것 자체가 2차 가해”라는 누군가의 비판에 속상함을 내비치기도 한다. 사실은 단단하다고, 아니 냉정하다고 생각한 선배도, 계속 자기검열과 반성과 확신을 오가는 중일 것이다. 

꼭 방송에 나와 줬으면 싶은 사람이 출연을 거절할 때는 참 난감하다. 올 초, 트랜스젠더 군인과 대학생이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군대와 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사수 선배와 함께 우리 사회 곳곳의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찾아다녔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편견과 혐오는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고, 트랜스젠더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성전환 수술까지 마치고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트랜스젠더로서는 굳이 자신의 정체를 알리며 방송에 나올 이유가 없다. 실제로 상당수의 트랜스젠더가 남편이나 가족에게 해가 될까봐, 혹은 직장 생활이 어려워질까봐 출연을 거절했다. 이런 대답에 나는 차마 다시 한 번 더 나서지 못했다. “이 집 참 맛있어요” 같이 너도 나도 부담 없는 멘트를 듣고자 했다면 “에이~ 한 번만 해 주세요”라고 들이대보기라도 할 텐데 누군가의 인생이 걸린 일에 내가 뭐라고 부탁을 하겠나, 싶어서였다. 그들의 인생이 달린 프로그램이라는 부담감이 무거웠고, 한편으론 그게 예의고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수 선배는 참 끈질겼다. 그들의 출연이 다른 트랜스젠더들에게는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비(非) 트랜스젠더들에게는 편견을 깰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을 거듭했다. 저렇게 부담을 주면 어쩌나 싶을 무렵, 생각보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카메라 앞에 나서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용기를 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 얼굴과 목소리를 그대로 내보내기 어려웠지만, 자퇴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게 된 사연을 들려준 사람도 있었다. 얼굴만 가리면 목소리는 괜찮다며 자신의 일상을 숨김없이 보여준 사람도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출연자가 있다. 그는 직장 동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용기를 내어 방송에 얼굴을 드러냈다. 여자로 태어난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가 남자라고 느꼈다. 자기 정체성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스스로를 미워하고 부정하다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두 번째 자살 시도 후 응급실에서 겨우 깨어난 그는 이렇게 살밖에야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자는 마음으로 성전환 수술을 했고, 지금은 그의 진정한 본 모습을 찾아 남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고백 덕에 나는, 그리고 많은 시청자들은, 트랜스젠더의 삶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트랜스젠더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무수히 많은 이름표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걱정은 남았다. 방송이 나가면 직장 동료들이 성전환 수술 사실을 알게 될 텐데 어떡하나요. 제작진의 질문에, 그는 방송사 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편견 없이 대해주었듯,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동료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는 자기 몫의 책임을 알고 있었고,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선배는 그 가능성을 믿고 끈질기게 출연을 부탁했을 것이다. 

이제 고작 2년차 PD인 나도 언젠가는 남들 앞에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내 인생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들게 될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출연자들에게는 그 자체로 자기 인생의 프로그램들일 것이다. 그것이 그저 출연만으로도 즐거운 맛집 방송이건, 일생의 결단을 하고 출연한 시사 프로그램이건 말이다.

내 방송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기쁨과 부담,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무수한 가능성들을 오롯이 느끼고 감수하면서 나아가는 PD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인생의 결단을 내리고 출연한 프로그램, 이것을 ‘그들 인생의 프로그램’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런 방송들 덕분에 우리 세상은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