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가 ‘다큐 3일’ 촬영 현장 
상태바
예측불가 ‘다큐 3일’ 촬영 현장 
'주문진항 72시간'편 궂은 날씨와 코로나19 변수로
'망했다' 연발했지만...어민 인터뷰엔 진정성 담뿍
  • 이은미 KBS PD
  • 승인 2020.08.31 14:5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30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3일' 방송 화면.
지난 30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3일' 방송 화면.

[PD저널=이은미 KBS PD] 예측이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상황.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는 요소겠지만 특히 PD에게는 최악이다. 2020년 상반기는 코로나19와 폭우, 수해, 각종 재난들이 기억에 남는 시간이다. 더 두려운 것은 끝이 어디인지, 언제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거다.  

이렇게 뒤숭숭할 때 유난히 생각나는 그림이 이건용 미술가의 작품이다. 캔버스를 자신의 등 뒤에 놓고, 우연과 운에 맡긴 채로 붓 칠을 한다. 그것이 작품이 된다. 일단 그렇게 그려도 작품이 된다는 것이 부러웠고, 왜 어떤 완성작이 나올지 예측되지 않는 작업 방식을 택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미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 용돈을 모아 사고 싶었던 그림이다. 물론 초보 미술 감상자에게는 어마어마한 액수라서 포기했지만.
 
 얼마 전 나 역시 한치 앞도 예상 할 수 없는 촬영을 경험했는데, 그 후 작품에 더 애착이 갔다. 촬영 마지노선 날짜는 다가오는데 아이템이 자꾸 엎어졌다. ‘모든 것이 아이템이 된다’고 평소에 믿어 왔고, 웬만해서는 아이템을 엎지 않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잘 풀리지 않았다. 

강원도 아무개 마을로 답사를 갔는데, 이틀 동안 작가들과 현장 취재를 해도 큰 이야기 줄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행선지를 급하게 바꾸고, 답사 출장 일수를 하루 더 늘렸다. 일단 강원도 내에서 어떻게든 새 아이템을 찾기도 하고 승합차 안에서 휴대폰으로 기사와 자료를 검색했다. 맨땅에 헤딩을 한두 번 하나. 

 맨땅에 하는 헤딩은 아팠다. 휴가철이라 숙소가 없어 승합차에서 4명이 새우잠을 잤다. 세 시간 쪽잠으로 몸을 고생시킨 덕인지, 새벽에 출항하는 선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고, 주문진항 홍게 조업 현장 72시간을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촬영팀 10명과 도착한 항구와 어민 시장에 인적이 없었다. 홍게도 없었다. 풍랑주의보가 내려 출항이 불가했다. 답사 때 확인한 새벽 경매도 내일부터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뿔싸. 

  오히려 어민들이 제작진을 걱정한다. 이런 날 촬영할 수 있겠냐고. 누가 촬영 날짜를 잡았냐고. 날짜야 PD가 정하지만, 날씨까지 어떻게 정한단 말인가. 예전 같으면 휴가차 놀러 온 관광객들이 횟감을 사서 근처 상차림 식당에서 푸짐하게 먹을 텐데,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서 오징어 한 마리를 사서 가족들이 한입씩 맛보는 정도이고, 횟감도 사서 숙소에서 먹는다고 한다. 촬영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찍을 그림‘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10명을 끌고 왔는데, 다시 서울로 갈 수는 없는 일. 그냥 날씨 상황을 최대한 담아달라고 VJ 감독들에게 디렉션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기예보를 계속 ’새로 고침‘하며 확인해도 비구름 아이콘이 바뀌지 않는다. 비가 그쳐도 풍랑주의보가 일면 배들을 출항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 홍게들...붉은 홍게에 노을 지는 주홍 하늘이 같이 담긴 미장센까지 생각해 두었는데.... 

 마음 한 구석에는 콘셉트마저 흔들렸다. 처음 계획처럼 홍게 배를 타야 하는지, 아니면 붕장어 배든 오징어 배든 보이는 배라면 뭐라도 얻어 타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비바람 날씨 탓인지, 이상하게  기존 촬영 때보다 심한 피곤이 몰려왔다. 

아침, 점심, 저녁. 짬짬이 8명의 PD, 작가, 촬영팀이 자주 모여 대책회의를 해도 뾰족한 방향이 없다보니 ‘괜찮아요. 비바람 부는 날씨랑 시장에 있는 생선 인서트만 많이 찍어 주세요. 다 스토리가 되니 저만 믿으세요“라는 뻥카만 날린다. 사실은 속마음도 타면서.  

에이, 이번 편은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일단 안전하게 촬영만 마치자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자꾸 드는 생각. ‘이번 편 재미없으면 어쩐다’. <다큐멘터리 3일>은 자료 구성도, 시간 뒤집기 편집도, CG나 말자막 꾸밈도 없는 순도 98의 정주행 편집법이다. 소위 말하는 ‘원단’이 재미없으면, 편집 때 별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한 번 드는 생각, ‘이번 편은 망했다’.  

지난 30일 주문진항 72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 3일' 방송 화면 갈무리.
지난 30일 주문진항 72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 3일' 방송 화면 갈무리.

한숨을 쉬며, 편집기 앞에 앉았다. VJ감독들이 찍은 영상에는 촬영 3일째에 잠시나마 갠 하늘을 보러 나온 어민들과 관광객의 표정과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긴 비 끝에 드러난 파란 하늘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됐다. ‘날씨’ 이야기로도 휴먼 다큐멘터리 구성이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문진항 어민들의 인터뷰는 더 진정성 있었다. 날씨가 험하고, 코로나19로 생계가 어려운 와중에도 반복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대한민국 모두 힘내자’는 내용이 나왔다. 어쩌면 계획을 세우고 콘셉트를 만드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느 미사여구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또 느끼게 된다. 자연 앞에서 내일을 예측한다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던가. 

 미리 정하는 콘셉트도, 예측된 결말도 없는 ‘날것’. ‘날것’들은 항상 예측불가능하고 불확실하다. 이건용 화백의 그림들은 어쩌면 겸허함과 겸손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캔버스 위의 붓질이 세상 풍파를 다 지켜본 노화백이 담아내고 싶었던 한 점이 아닐까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럭키 2020-09-01 17:26:38
우연히 본방송을 보고 다시보기를 찾다가 이 글을 찾았는데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제작진들의 노고가 느껴지는 방송이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