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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9 11:30
  • 수정 2020.10.05 11:56

'노는언니' PD "평생 운동한 女 스포츠 스타들, 쉬는 법 알려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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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영 CP, 예능에 등장하지 않았던 직군 찾다 E채널 '노는언니' 기획
"채널 시청률 등 참고 자료 없어 기존 예능 분법과 다른 시도 가능"

[PD저널=김윤정 기자] "어떻게 이런 기획을 했어요?“ E채널 <노는언니> 섭외 제안을 받고 박세리가 보였다는 반응은 여성 예능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스포테이너(스포츠+엔터테이너)를 전면에 내세운 예능을 흔하지만, 여성 스포츠 스타만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노는언니> 전에는 없었다. 

지난 8월 방송을 시작한 <노는언니>는 박세리 남현희 한유미 곽민정 정유인 등 운동만 하느라 남들 다 하는 물놀이 한 번, 캠핑 한 번 즐기지 못했던 ‘언니들’에게 마음껏 놀 기회를 준다. ‘스포테이너 전성시대’라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여성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방송가의 새로운 시도다.

방현영 PD는 ‘여성 출연자들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여성 출연자들은 몸을 사린다’ 등 예능가에 오랫동안 퍼져있던 편견을 보란듯이 <노는언니>로 깼다. 

방 PD는 MBC와 JTBC를 거쳐 최근에 책임 프로듀서로 E채널에 왔다. 지상파가 영원히 미디어 주도권을 놓지 않을 것만 같던 시기에 신생 채널인 JTBC로 이적했고, JTBC가 안정 궤도에 오르자 이번엔 E채널로 이적했다.

지난 25일 취재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프로그램이 어떤 채널에 나와야 성공한다는 공식 자체가 없어지기도 했고, 도구가 훌륭해야 (시청률이) 잘 나오는 시대도 아니”라면서 “스스로를 시험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무모하지만 (티캐스트로) 왔다”고 회사를 옮긴 이유를 설명했다. 

<노는언니>는 그의 이런 도전정신과 그리 높지 않은 채널 인지도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노는언니>는 그동안의 예능 문법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탄생한 프로그램이에요.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시청률이나 채널 데이터를 참고하는데, 참고할 데이터조차 없었거든요. 평소 관심 있던 문제를 질러 보자. 그동안 예능에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신(新)인류’를 발굴해보자. 이런 마음이 컸죠.”

'노는 언니'를 기획한 방현영 CP.
'노는 언니'를 기획한 방현영 CP.

방 CP는 JTBC 개국 당시 남성 외국인(비정상회담), 셰프(냉장고를 부탁해), 의사(닥터의 승부) 등 기존 예능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 직업군을 부각한 예능프로그램으로 채널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노는언니>도 ‘그동안 미디어에 자주 나오지 않았는데 보고 싶은 사람 누가 있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성 스포츠 스타들을 한자리에 모으자. 여기까진 쉬웠어요. 그런데 진짜 고민은 ‘모여서 뭘 하지?’ 였죠. ‘승부사’로 성장한 선수들이니만큼 이들의 승부욕이 부각될 만한 도전을 해야 하는 건지, 이분들의 운동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지... 지금 시대에 ‘유명인들이 자기들끼리 논다’는 기획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죠."

확신은 선수들과 만나면서 생겼다. 엄격한 규율 속에 운동만 해온 여성이라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운동만 하느라 또래와 어울리지도 못하고, 여행도 못 가고, 부상 위험 때문에 무언가 쉽게 도전해보지도 못했다는 이야기에 뭔가 페이소스가 있더라고요. 꼭 운동선수가 아니라도, 늘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죠. 운동만 하면서 산 언니들에게 놀기를 가장한 경험의 확장을 선사하고 싶었어요.”

'언니들'은 제작진 개입이 최소화된 환경에서 말 그대로 놀고 즐기면서 촬영에 임하고 있다. 제작진이 “언제 카메라를 끄고 켜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카메라를 개의치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노는언니>의 인기 요인 중 하나다.

“<노는언니>는 예능의 모든 규칙과는 거리가 멀어요. 보통 예능 프로그램들은 리얼 버라이어티라고 해도 제작진이 스케치북으로 개입해 흐름을 이끌어요.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선수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가죠. 첫 회에 갈빗집에서 처음 만나 대화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서로의 종목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하고, 현역 선수들은 은퇴한 선수들에게 ‘은퇴’에 대해 묻기도 하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솔직한 대화이기 때문에 흡인력이 더 높다고 생각해요.”

각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선수들이니만큼 그들의 이야기는 때론 감동을, 때론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메달과 기록으로 기억되는 성취 뒤에 선수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 어렴풋이 보인다. 선수들은 다른 스포츠를 배워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고 하는데, 다른 종목 스포츠를 하다 필요 없는 근육이 발달하면 경기력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부러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출연자들이 <노는언니> 섭외 요청에 응한 이유도 여성선수, 각 종목을 대표하는 선수로서의 사명감이 컸다고. 낯선 예능의 세계에 발을 들인 선수들의 솔직한 모습에 시청자들도 호응을 보내고 있다. 재밌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최근 넷플릭스 '한국 TOP 10'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 선수들에게 향하는 '부정적인 댓글'을 볼 때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캠핑에 가서 김치찌개를 만드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당연히 훈련 계획표대로 살아오신 분들이고, 급식으로 자란 분들이잖아요. 스스로 요리하는 게 서투를 수밖에 없죠. 제작진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못하나?’ 싶어 재미있고 신선했어요. 선수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이 불편함을 호소하시더라고요. 그만큼 미디어가 요리 못하는 여성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단편적인 모습보다, 이분들의 삶에 주목해 봐주시면 이해되지 않으실까 싶어요.”

'노는언니' 출연자들. 

<노는언니>에서 출연자들은 운동 선후배가 아니라 언니, 동생으로 대한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역할이 아닌 출연자 간의 관계성을 강조한 것인데, 방 CP는 이러한 관계 설정에서 선수들이 해방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먹는 것 좋아하고, 잘 쓰고, 잘 웃고, 잘 노는 맏언니 박세리의 역할이 크다. 방송 초반 카메라 앞에서 쭈뼛대던 동생들도 박세리 주도하에 지금은 마음껏 먹고 놀고 즐기고 있다. 선수 시절부터 여러 인터뷰에서 보여준 유려한 말솜씨는 물론, 최근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예능인으로서의 매력과 잠재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맡긴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주위에서 그래도 전문MC 역할을 해줄 예능인 출연자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저 역시도 갈등한 부분이 있었는데, 막상 뵙고 인터뷰 나누면서 걱정을 덜었죠.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 언니한테 질질 끌려가는 느낌도 들었지만. 하하하. 판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이다, 해볼 만한 카드다,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인터뷰이로, TV 프로그램 게스트로 보여주신 정제된 말도 잘하셨지만, 친한 동생들과 나누는 사적인 언어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죠.”

방현영 CP는 출연자들과 거대한 도전, 목표를 꿈꾸고 있지 않다. 그저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다양한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을 뿐이다. 캠핑, 호캉스 등 초반 아이템은 제작진이 냈지만, 요즘은 출연자들이 ‘이런 거 해보고 싶다’며 내는 아이디어도 많다. 춤과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제안, 식당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제안 등등 못 해 본 게 많은 언니들이니 만큼, 아직은 하고 싶은 게 많아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

“은퇴하신 분들도 여전히 제대로 쉬지 못하시더라고요. 김은혜 선수는 은퇴하고 뭘 할지 몰라서 이제야 <커피프린스 1호점>을 몰아보셨대요. 무려 13년 전 드라마를요. 그런데 소파에 누워 멍하니 드라마를 보다 죄책감이 드셨대요. 그래서 나가 골목을 뛰다 오셨다더라고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망중한을 즐기면 죄책감 느끼는 생활이 몸에 밴 분들이신 거에요. 이 분들에게 쉬는 법도 알려드리고 싶어요. 혼자 하기 어렵고 어색한 것들을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경험해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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