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 긴즈버그가 남긴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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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35] '위험한 민주주의'

지난달 세상을 떠난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을 추모하며 추석 연휴기간 상영 중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나는 반대한다' 스틸 이미지.
지난달 세상을 떠난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을 추모하며 추석 연휴기간 상영 중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나는 반대한다' 스틸 이미지.

[PD저널=오학준 SBS PD] 9월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방대법관으로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에선 지명 이전부터 인준 청문회와 투표를 진행할 것이라 선언한 상태였다. 민주당은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같은 상황일 때 공화당이 인준을 거부하고 내세운 논리를 들어 후임 대통령에게 지명권을 넘겨야 한다고 항의하고 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을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언사들을 남발해왔다. 우편 선거를 부정 선거라 비난하고, 선거 패배 시 결과에 불복할 것이란 속내를 내비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민의의 대변자라고 말한다. ‘인민들’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빈자리를 즉시 채워야 한다고 말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인민’이 아니다.

때로는 위대한 판결들로 사회의 진보를 이끌던 연방대법원이, 이제는 개인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다. 2년 전 출간된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를 다시 들춰보는 건 그의 진단이 여전히 유의미하며, 동시에 그가 내놓은 해법을 아직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트럼프는 예외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해체되며 내는 정치적 파열음의 한 사례일 뿐이다. 세계 도처에서 발흥하는 극단주의자들의 사례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이 공고하다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하며, 손쉽게 자유민주주의가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나 반민주주의적 자유주의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을 공공정책으로 효과적으로 해석하고, 선거로 구성되는 일련의 제도들이다. 자유주의 제도는 법치주의를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모든 시민에게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 자유주의 제도는 민의를 제어하는 안전핀이며,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제도의 정당성을 시험하는 기제다. 

둘을 안정적으로 조합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들이 있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낳은 중산층의 낙관적인 미래 인식, 극단적 의견의 유통을 제한하고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 대중 매체, 공통의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이다. 대체로 자유민주주의가 안착한 나라들은 이 조건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저자는 경제 성장이 침체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상실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가 일체감을 훼손하며, 국제화에 따른 대규모의 인구 뒤섞임이 불러오는 불안감이 소수자나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로 이어지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양극단으로 분열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유일하게 정당한 게임의 규칙이라는 믿음의 토대들이 사라지고, 권위주의적 독재자의 통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 한쪽에서는 통제 불가능한 민의를 앞세우는 포퓰리즘 정치 세력이 득세하고, 다른 한쪽에선 민의를 반영할 마음이 없는 정치 엘리트들이 인민의 불만을 부추긴다.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

저자는 자유와 평등,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이들은 극단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구출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안정적인 결합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조건을 오늘날 다시 재발명하기를 요청한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민주주의적 주체로서 자라날 수 있도록 교육하며,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어야만 자유민주주의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언제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은 국가가 개인의 삶의 영역에 더 깊숙이 개입하고, 자본과 노동의 힘의 관계를 조정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적 요소들의 개입을 요청한다. 공공주택을 공급하고, 일자리를 확보하라는 저자의 요청은 낯설지 않지만 새롭지도 않다.

저자의 온건한 요청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수입과 지위를 유지하기에도 벅차고, 주택가격은 쉼 없이 오르고 있다. 나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분노는 동료 시민들, 동료 이민자들, 동료 성소수자들을 향한 혐오로 손쉽게 전환된다. 소셜 미디어는 분노를 증폭시키며, 이는 극단주의 정치세력의 동력으로 전환된다. 정치의 사법화와 포퓰리즘은 동전의 양면이다. 

민주주의는 자치와 자유를 약속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극단의 정치는 그 분노의 표현이다. 저자가 요청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믿을만한 약속일까? 위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 경제적 불평등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키는 제도 개혁만을 반복한다면, 평등도 자유도 반복적으로 배반당할 것이다. 어쩌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균열은 의외의 지점에서 해소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짊어진 권한의 크기를 알기에, 트럼프의 임기가 끝날 때까진 살아있길 바랐던 긴즈버그의 고뇌를 생각한다. 그녀가 미국 사회의 진보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한다. 동시에 연방대법원이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큰 권한을 쥐는 게 ‘민주주의’인지를 고민한다. 변덕스러운 민의를 제어하는 고삐의 적절한 크기는 얼마인가. 그리고 그 고삐는 누가 쥐어야 하는가. 극단의 시대에 거인이 남긴 질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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